그룹명/우아한 독설

트럼프 대통령 탄생 ; 세계화의 종언과 극우주의의 태동

zamsi 2016. 11. 9. 19:45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다. 맙소사. 미국 시민은 결국 극우주의자를 대통령으로 선택하고 말았다. 트럼프가 그동안 쏟아 낸 인종, 여성 차별을 뛰어 넘는 악머구리를 살펴보면 트럼프를 극우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면 자유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미국이 왜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극우주의자 트럼프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선택했을까? 그 이면을 찬찬이 살펴보면 미국민의 선택에 철저하게 경제적 논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세계화. 그동안 진보와 보수는 신자유주의를 놓고 끊임없이 투쟁해왔다. 80년 대 초반 미국에서 태동된 신자유주의는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레이건노믹스와 대처리즘에 의해 급물살을 타고 온 지구를 뒤덮었다. 세계 경제를 호령하던 미국이 동을 뜨자 일본은 물론이며 유럽까지 전 세계에 그야말로 세계화의 광풍이 쓰나미처럼 밀어닥쳤다.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유럽이 경제단일 블록을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EU. 하지만 EU 역시 이름을 달리한 또 다른 유럽식 신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신자본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산업혁명의 뿌리가 된 자유주의 무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경제적 논리는 철저하게 자유주의에 맡기자는 정책이다. 미국이 압제하는 FTA는 신자유주의를 전파하는 첨병이다. FTA란 쉽게 말해 두 나라가 자유로운 무역에 장애가 되는 벽을 허물고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하고 교역하자는 것이다.

 

   언뜻 듣기에는 아주 공정한 무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이 숨겨져 있다. 예컨대 각국의 경제적 상황, 노동자의 임금조건 등이 똑같아져버린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장이 생기지만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경쟁자가 생기는 것이다. 기업은 노동경쟁에서 원가 절감을 위해 값싼 노동력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값 싼 노동력이 원가를 낮추는 길이며 판매 즉 무역 경쟁에서 이기는 길이다. 기업은 시장을 얻고 노동자는 임금을 잃는 것이 FTA, 자유무역의 함정이다.

 

   물건을 만드는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의 노동력이다. 미국과 한국의 노동자의 가치와 능력은 다르다. 생산가치도 임금도 경제적 규모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싼 노동력을 가진 국가가 유리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싼 노동력을 가진 국가의 경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싼 임금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똑같은 노동력을 가지고 시장이 더 커진 반면에 노동자의 경우 임금이 동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모든 가치를 자유로운 시장경제에 맡김으로써 노동자의 임금은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다. 기업의 입장에서 당연히 싼 노동력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바로 비정규직과 외국인 노동자이다. 비정규직과 외국인노동자의 양산은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의 소산물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각국마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글로벌대기업이 탄생하고 자본의 힘이 경제를 압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 중산층이 무너지고 서민은 빈민으로 몰락하고 만다. 노동자의 임금은 오르지 않고 비정규직과 경제력이 낮은 국가에서 물려드는 외국인노동자가 급증하여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켰다. 기업의 이윤은 커져가지만 고용은 늘지 않으며 내수경제 보다는 수출경제에 의존하는 현상을 낳는다. , 고용 없는 성장으로 경제 지표는 올라가지만 대다수 대중은 가난해지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 각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나는 현상이며 확실한 사실은 절대다수의 대중이 갈수록 가난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경제의 규모는 계속 커져 갔지만 그 과실은 거대자본으로 편입되고 말았던 것이다. IMF 이후 공룡처럼 성장한 국내 재벌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을 깨트리기 위해 세계 각국의 진보정치인들은 신자유주의 타도를 내 걸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 그들이 만들어 내는 논리를 따지고 보면 신자유주를 각색한 또 다른 신자유주의다. 유럽의 좌파정권들이 모색한 3의 길사회투자국가론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구조적인 청년실업, 만성된 저성장, 실질임금의 하락으로 인한 삶의 질 악화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신자유주의 정책과 괘를 같이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점층된 대중의 분노가 세계적으로 크고 작은 소요를 만들었지만 강고한 신자유주의의 벽을 허물지는 못했다

 

   정치가 민중의 분노를 대변하지 못하면 적층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다.  하지만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탄생은 민중 분노의 분출방식이 신자유주의를 만들어 낸 자본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유의를 만들어 낸 세력을 지지하는 모순을 만들고 말았다. 영국민이 보여 준 브렉시트와 미국민이 선택한 트럼프는 이러한 점에서 똑같은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승리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우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불만 증폭이다. 멕시코인에 대한 증오를 부추긴 트럼프는 그런 점에서 탁월한 선동가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자유무역이 아닌 보호무역을 앞세우고 있다. 어떻게 보면 진보 정치인들이 감히 내세우지 못했던 반신자유주의 정책을 표면화시킨 것은 극우 성향의 정치인들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대통령 현상은 그런 점에서 쌍둥이처럼 닮았다.

 

미국과 영국이 선택한 반신자유주의 정책들이 진보정치인들이 아니라 극우정치인들에 의해 태동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하다. 진보정치인들이 기존 정치질서가 파괴되는 현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을 사린 결과인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은 기존의 문제점에 포획되어 질서 파괴를 두려워하며 스스로 문제점에 안주해버리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겪고 있다. 혁명이 사라진 세계에서 진보를 참칭하는 정치인의 비극이자 한계일지도 모른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에 보여주는 기성 정치인들 역시 이 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치가 민중에 이끌려 가면 결국 중우정치를 낳게 된다. 브렉시트, 트럼프 대통령을 넘어 혐오의 정치, 극우의 정치가 세상을 파쇼로 몰아갈 수도 있다.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되는 극우의 바람이 세계를 다시 극단으로 몰아갈지도 모른다. 이러한 염려가 정말 쓸데없는 기우로 끝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