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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수꾼' 지켜 줄 사람 없는 세상

zamsi 2016. 11. 25. 23:17



   한 때 영화판에서 들고찍기(핸드헬드)기법이 유행처럼 성행한 적이 있었다. 90년대 영화계를 광풍처럼 휩쓸었던 양가위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즐겨 쓰던 촬영기법이다스쳐가는 찰라의 독창성을 놓치지 않고 화면에 드러나는 정직한 생동감을 담을 수 있어 소위 예술영화를 지향하는 감독들이 즐겨 사용했다.

 

   하지만 카메라가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니 화면이 투박하고 인물이 과도하게 클로즈업되어 극 몰입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실제 라스 폰 트리에는 영화에서 인공미를 차단하여 있는 그대로 현상을 투영하기 위해 들고찍기를 고집했다.

 

   개인적 취향이지만 들고찍기 영화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말장난 같지만 인위적인 작업을 배제한다는 자체가 외히려 더 작위라는 생각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좋다. MSG 팍팍 친 들쩍지근한 영화가 편하다. 사람이나 영화나 불친절한 등속 따위는 딱 질색이다.

 

   들고찍기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은 이유는 오늘 소개할 영화 때문이다. 우연히 인터넷을 뒤지다 걸려 든 한국영화다. ‘파수꾼’, 얼핏 봐도 상업영화로는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다. 무슨 종교단체에서 나눠주는 전단지 이름 같다. 찾아봤더니 감독이 감명 깊게 읽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따왔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90년대에 한국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뒤늦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당시 무릇 식자연한 청춘들이 열렬히 동경해 마지않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끔찍이 좋아하는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하루키와 양가위는 닮은 구석이 있는데 둘 다 삶에 대해 차가울 정도로 관조적이면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는다. 두 사람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사회와 단절하고 개인으로 웅크려 든 밀폐된 자아를 가지고 있다. 사회와 단절한다는 말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들은 관계하지도 간섭 받지도 않는 절대 고독 속에서 자유로워 진다. 그런 점에서 감독은 양가위와 하루키의 자양분을 먹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윤성현 감독, 물론 내 무식의 소치이겠지만 이름이 낯설다.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몇 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대충 훑어만 봐도 아직은 예술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에 머뭇거리고 있는 듯하다. 개인적 판단이지만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봉준호의 초기 영화처럼 무릎을 치게 만드는 번뜩이는 천재성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창동이 보여주는 현상에 대한 묵직한 시각과 끈질기게 현실에 천착하는 고집이 보인다. 앞으로 윤성현 감독을 지켜보기로 했다. 뭐 내가 지켜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영화는 호밀밭의 파수꾼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10대 세 소년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다. 흔히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십대들의 삶은 부박한 현실에 부대끼며 아프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아픔 속에서도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젊음과 낭만이 흐드러져 독자 혹은 관객에게 아련한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런데 영화 파수꾼에 등장하는 소년들의 일상은 아름답지도 낭만적이지도 않고 사뭇 처절하고 외롭기만 하다. 주인공들은 꿈도 열정도 없이 하루의 더께에 내일을 얹어 그저 살아가고 있다. 

 

   감독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군상들의 성장통을 표현하는데 있어 일체의 작위와 신파를 배제하고 날것 그대로 현실을 투사한다.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재단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왜 무슨 이유로 싸우고 서로를 미워하고 사랑하는지에 대한 어설픈 비판과 고발도 없다. 우리사회가 가진 음습한 병폐에 대한 작가라는 이름의 지적질도 하지 않는다정물화를 그려내듯 있는 그대로 현실을 복사한다. 리얼리즘은 리럴리티를 벋어날 때 비로소 리얼리티를 포착한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들고찍기로 관객의 시선을 어지럽힌다. 한갓진 뚝방길을 한 무리 청소년들이 담배 연기 표표히 흩날리시며 제법 야무진 후까시를 이빠이 장착하고 걸어간다. 들고찍기의 불친절함 속에서 집중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데 커서를 움직여 화면을 닫아버리지 않은 이유는 어린 배우들의 각이 선 눈빛이 좋아서다. 눈빛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정직한 연기를 하고 있다는 증거다. 배우의 연기에서 자연스러움을 이끌어내는 일은 감독이 가진 가장 큰 재능 중 하나이며 그런 영화는 제법 볼만하다는 것이 지금까지 경험칙이다. 왕왕 한 순간의 선택이 기쁨과 행복으로 뒤바뀌는 경우가 있는데 영화 파수꾼이 그랬다. 사실 고백하자면 조금 감동먹었다.

 

   한 소년이 죽었다. 왜 죽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죽은 소년이 누구인지도 명확하지도 않다. 영화는 아이를 잃은 아비가 아들이 죽은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과거와 현재가 숏컷으로 툭툭 튀고 시퀀스는 시공의 경계를 무시로 넘어 점프한다. 들쭉날쭉한 편집 속에서도 영화는 묘한 흡인력을 갖는다. 이야기에 빠져드는 가장 큰 힘은 세 주인공의 뛰어 난 연기력이다. 지금은 이미 스타 반열에 오른 이제훈을 비롯하여 박정민과 서준영의 그 주인공들이다.

 

   극 중 기태역을 맡아 불안한 영혼을 연기하는 이제훈의 연기에 가식이 없다. 제임스 딘이 이유 없는 반항으로 방황하는 청춘을 표현했다면 이제훈은 이유도 모르는 불안한 청춘을 연기한다. 정교한 계산속에서 계산된 연기를 교묘하게 숨기는 것은 분명 타고 난 능력일 테다. 인물에 너무 잠식되어 과도한 감정이입이 드러 날 때도 있지만 선량한 눈빛이 저처럼 무섭게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연기다. 그에 반해 박정민의 연기는 딱딱하다고 느낄 만큼 절제되어 있다. 표정을 남발하지도 않고 누구처럼 눈에 힘을 주어 감정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가만히 있으면서도 존재감을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양조위가 떠오를 만큼 깊고 좋은 눈을 가졌다.

 

   개인적 취향이지만 영화에서 가장 놀랍게 본 배우는 서준영이다. 이제훈과 박정민은 영화에서 한두 번쯤은 본 것 같은데 서준영이라는 배우는 정말 처음이었다. 서준영의 연기가 놀라웠던 이유는 극 중 동윤이 가장 연기하기 힘든 배역이기 때문이다. 연기자의 입장에서는 인물의 성격이 또렷할수록 오히려 연기하기가 편하다. 동윤은 세 친구 중 인물을 설정하기 가장 힘든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 가장 연기하기 힘든 배역 중 하나가 주인공의 친구’인데 서준역이 연기한 동윤이 바로 주인공의 친구역이다.

 

   동윤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 배역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이제훈이 연기한 기태와 박정민이 분한 베키의 갈등으로 시작된다. 동윤은 그 틈바구니에서 존재 가치가 거의 없다. 하지만 극이 종반부로 갈수록 동윤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간다. 그리고 후반부 기태와 갈등이 폭발할 즈음에서는 서준역은 차마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도드라진 연기를 보여준다. 그다지 멋지게 생기지도 않고, 평범하면서도 밥만 많이 먹게 생긴 선하디 선한 얼굴인데 장면을 돌려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멋지다. 서준영이라는 배우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영화를 보다가 연기가 좋은 배우를 만나면 왠지 횡재한 기분이 드는데 서준영이 그랬다.

 

   누구에게나 10대는 있다. 나의 10대 역시 남들처럼 아프고 힘들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식구는 뿔뿔이 흩어져 세상에 오직 나 혼자인 것만 같았다. 밤마다 관처럼 좁은 친척집 부엌방에서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었다. 소설에 빠져 있을 때 외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르만 헷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정말 좋았다. 그 조용한 밤 사르륵 사르륵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듣다보면 새벽 동이 터왔다. 너무 외롭고 견디기가 힘들어 수면제를 사 모았다. 인쇄소에 다니던 사촌 형이 남겨 둔 캡틴큐 한 병을 나발 불고 수면제를 털어 넣었다. 생각해보면 죽지 않을 만큼만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떴을 때 살았다는 느낌보다는 이불에 오줌을 쌌다는 부끄러움이 더 컸다. 거의 24시간을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아이였다. 아무도 내가 죽으려 했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것이 더 슬펐다.

 

   한 소년이 죽었다. 왜 죽었는지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죽은 소년은 외로웠다는 사실이다. 가식적인 것을 좆나게싫어하는 소년은 자신의 외로움을 가식적으로 감춘다. 경쟁 사회에서 외로움은 패배와 같은 말인지도 모른다. 우린 모두 외롭지만 함부로 외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패배가 두려워서 이다. 외로움은 패배를 만들고 패배는 경쟁사회에서 단절을 의미한다. 져도 좋은데, 져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우린 이기려고만 든다. 더 이상 정차하지 않는 간이역 철길에서 동윤은 갈 길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 허망한 눈빛이 참 서럽다.

 

나는 외롭다. 그래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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