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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 운명에 대한 저항

zamsi 2016. 12. 6. 01:31

 

 


  예술은 자아를 취하게 만들고 중독된 자아는 아름다움을 얻기 위하여 영혼을 매도한다. 검은 백조가 되기에는 너무 순수했던 영혼. 예술가는 결국 순결한 영혼을 팔아 한 마리 검은 백조가 된다.

 

"나는 완벽해"

 

  주인공 나탈리 포트만의 마지막 독백은 그래서 슬프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전된 듯한 전율이 스쳐지나갔다. 블랙스완,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슬프고 아름답고 농밀한 영화다.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는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모든 여자 연기자들을 합친 것보다 더 훌륭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처음 그를 만난 것은 영화 '레퀴엠'이다. 2002년 무렵이니 지금으로부터 꼭 15년 전 글을 쓴 답시고 무작정 회사를 때려치고 백수가 되었을 무렵이다. 생각해보면 글을 쓰기 위해서라기 보다 반복된 일상의 무료함이 지겨웠을지도 모른다. 퇴직금도 실업급여도 동이 나자 비로소 암울한 현실이 다가왔다.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며 빈둥거렸다. 겨우 하는 일이라고는 도서관을 다니며 책을 읽거나 시간을 때우려 비디오를 빌려 보는 것이 다였다. 우연히 비디오 대여점에서 영화 '레퀴엠' 에 시선이 꽂혔다. 우리 말로 하면 죽은 영혼을 달래는 진혼곡이다.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좋아하던 터라 무심코 손이 갔다. 당시 절망에 빠진 심상 때문이었을 테다. 하지만 영화가 얼마나 충격적이고 좋았던지 감상평을 몇 자 끄적였던 기억까지 있다. 대런 아르노프스키는 인간 내면에 깔린 심리를 탐구하는 작가다. 인간 본성에 대한 진지하고 도발적인 분석은 이후 작품 '레슬러'와 '노아'에 까지 연결된다. 특이한 점은 아르토프스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대부분은 삶의 질곡에 희생당한 실패자들이다.   


  블랙스완. 아르노프스키가 바라 본 인간의 영혼은 불안하다. 인간의 완전함에 대한 열망은 한계지어진 운명에 대한 저항이다. 블랙스완의 주인공 니나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발레리나다. 하지만 '완벽함'은 신만이 가질 수 있는 전유물이다. 인간이 완벽함을 얻기 위해서는 파우스트처럼 자신의 영혼을 사탄에게 팔아야만 한다. 니나 역시 영혼을 저당 잡히지만 결국 정해진 수순은 파멸이다.  파멸을 향해 치닫는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숨이 막힐 만큼 섬세하고 치밀하다. 


  영화는 차이코프스키의 발레극 '백조의 호수'와 현실을 교묘하게 대차하며 한 발레리나의 처절한 삶을 조명한다. 예술가는 운명처럼 한계와 맞닥뜨린다. 수 많은 예술가들이 스스로 한계가 버거워 삶을 버린 것처럼 주인공 역시 부나방처럼 자신의 영혼을 불싸른다.  그 우아하고 격정적이며 슬픈 몸짓이 너무 아프다. 허상을 쫓는 발레리나의 절규에서 현대인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발견한다.  


  어쩌면 우린 불안 속에서 평안함을 얻고 힘들게 얻어진 완전함을 스스로 깨어버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한 때의 꿈과 사랑 그리고 욕망에 거침 없이 몸을 던진다. 하지만 열정은 식을지 몰라도  뜨거움에 대어 버린 상처는 결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비루한 시간에 아무리 망각이라는 이름을 덧칠해도 꿈틀대던 기억은 우리 몸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인간의 양면성은 스스로를 견디기 위해 고안해 낸 치료제인지도 모른다. 선과 악, 사랑과 배신, 참과 거짓, 사람들은 스스로 함정을 만들고 기꺼이 빠져 허둥거린다. 니나 역시 자신이 만든 올무에서 벋어나지 못한다. 발버둥 칠수록 옥죄는 삶의 무게여! 운명에 저항하는 주인공 니나의 가녀린 몸짓이 슬프다.


  보들레르는 삶의 덧 없음을 한탄하며 무엇에든 취하라고 노래했다. 취하지 않고서는 인생의 허망함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영화를 보고나자 문뜩 취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