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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서판' 본성이 더러운 인간에 대한 변명

zamsi 2013. 9. 28. 22:56

 

  지금 읽고 있는 한 권의 책이 퍽 충격적이다.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원어로는 ' THE BLANK SLATE' 라는 제목의 책이다. 책 분량이 제법 길어 무려 800 페이지에 육박하고 있다. 지금은 미처 3분의 1도 채 다 못 읽었다. 변명 같지만 마음 놓고 책을 읽을 시간이 부족해 아주 틈틈히 짬을 내 맛난 음식을 숨겨두고 야금야금 훔쳐 먹는 기분으로 책을 읽고 있다.

 

  책의 내용은 인간의 본성을 다루고 있다. 집에 사두고 시간이 없어 서두만 간략하게 읽어 둔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좀 더 나아간 본격적인 인간의 본성에 관한 탐구서 같다.  내가 굳이 '같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아직  책을 완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읽어 본 책 서두는 인간의 본성을 사회과학적 시각이 아닌 생물학적 시선으로 찬찬히 분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과학적, 철학적 인간 본성의 탐구가 보여 준 맹신에 가까운 오류들을 하나하나 해체하고 해부한다. 책 내용이 다분히 도발적이라 책을 읽는 내내 나도 몰래 한 숨을 폭폭 쉴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 이유는 그동안 내가 믿어 왔던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 본성의 문제를 생물학적 의미를 넘어 사회, 문화, 예술, 신학, 정치, 철학으로까지 해석하고 있다. 예컨대 인간의 본성은 사회적 교육과 환경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리이다. 우생학적 생물학에 극단적 비판을 보내 온 좌파 학자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제법 핏대를 올릴만한 차별적 주장임이 분명하다. 인간의 DNA에 이미 생물학적으로 본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용인하기란 쉽지 않다. 그 견해가 생물학적으로 우열을 가리킴과 동시에 차별적 시각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녀의 본성이 유전학적으로 다르다는 견해는 페미니즘 입장에서 본다면 입에 거품을 물 차별적 주장이다. 나아가 인종으로 까지 옮겨가면 유물론적 관점으로 세상을 재단해 온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극우 파쇼적인 견해라고 말해도 가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저자는 다윈이 인간 진화론을 주장하고 그 견해가 정설처럼 굳어진 것처럼 인간의 본성 역시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은 출생이후 교육이나 환경 등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닌 유전자에 의한 성향이라는 견해를 과학적 분석과 실증적인 사례를 들면서 견지한다. 책 제목 '빈 서판'은 그동안 인간의 본성을 '비어 있는 서판' 으로 비유하여 교육과 경험과 환경에 의해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논리를 공박하기 위함이다.

 

  빈 서판이라는 말은 서양 정신철학사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경험론, 유물론, 관념론, 실존주의 등 수 많은 관념에 대한 은유적 비판이다. 인간의 본성은 결코 '빈 서판' 이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동등하고 평등하며 차별이 없다고 배워 왔다. 때문에 평등한 교육으로 기회를 균등하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원리라고 믿어 왔다. 하지만 이 책은 인간의 본성은 '교육되어 지고 사회화를 거쳐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생물학적으로 이미 만들어진 유전자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 본성과 인간의 신체는 둘로 나눌 수 없는 하나라는 의미다. 책의 해석을 따르면 우리의 정신세계는 마음이나, 사유 등의 체계가 아닌 뇌에 축척된 유전형질의 화학적 반응이라는 뜻이 된다. 성격이 공격적이고 온유한 것은 교육이 아닌 타고난 본성이며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본성의 대부분은 인간 DNA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책이 내게 충격을 주는 까닭은 나 역시 사람의 본성과 정신을 인체와 분리해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의 신념이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살아 왔다. 사람이 변화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신념이 바로 곧 변화의 중추이며 그로 인하여 인간은 곧 진화하며 발전해 나간다는 믿음이 내 정신 대부분을 지배해왔다. 내가 믿어 온 역사와 인간 진보의 사유체계는 바로 인간의 '신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신념이 육체를 움직이고 문화와 역사를 만든다는 것이 내 어줍은 철학의 바탕이었다.

 

  하지만 저자의 논리에 의하면 인간의 변화는 신념이 아닌 DNA에 내포된 타고난 원형질이 된다. 다시 말해 아무리 변화하려고 해도 자신이 타고난 본성은 변화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은 애매한 불가지론 마저 틈입할 수 없을 정도 확고하여 타협의 여지마저 없다. 

  

 미처 책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작가의 시각이 우려할 정도로 유전자적 차별을 인정하고 확정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책에서는 생물학적 차별을 악용해 온 나찌즘과 같은 전체주의적 사고에 대한 비판을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다 읽지 않아 그 내용을 확정하여 예단할 수는 없지만 인간 본성과 인간의 차별을 동급으로 기준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예고하고 있다.

 

  신념, 본성 등의 논리 등이 생물학적인 유전자적 화학 반응이지만 그 화학을 만드는 것에 환경의 영향이 개입될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남겨두고 있다. 고백하자면 남은 부분의 책을 읽기가 두려울 정도다. 지금까지 읽은 내용대로 정말 모든 인간의 본성이 철저하게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면 난 좀 많이 혼란스러울 것 같다.

 

  지금 내가 미처 다 읽지도 않은 책의 내용을, 별 재미도 없는 긴 글을 쓰고 있는 첫번 째 이유는 마쳐야하는 원고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원고 마감 날이 다가 올수록 괜한 조바심이 사람을 힘들게 한다. 두 번째 변명은 책에 의해 혼란스러운 내 심상을 정리하고 치유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의 내용이 다분히 딱딱하여 집중하여 읽지 않으면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남은 부분은 정말 야금야금 읽고 싶다. 뒷부분의 결말은 시간 나면 책을 다 읽은 후에 다시 쓰도록 하겠다. 혹? 궁금하신 분 계신가? ^^  모처럼 지루하고 딱딱한 글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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