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우아한 독설

정의사회 부재가 만든 옥주현 안티 신드롬

zamsi 2011. 6. 16. 13:04

  옥주현이 뭇매를 맞고 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안티세력의 집요한 표적이 되어 집중 포화를 당한다. 행여 그녀에 대한 작은 옹호라도 거들라치면 대번에 옥주현 알바가 되거나 옥주현의 막강한 권력에 포섭된 하수인이 되고 만다. 옥주현 안티세력들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그들만의 프레임으로 현상을 재단하기 때문에 그 어떤 반론이나 주장도 여지 없이 묵살되고 만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비이성적 사고 이건 분명 파쇼다

 

   이러한 현상은 옥주현 뿐만 아니라 그 이전 타블로라는 가수에게도 적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 악플러라는 이름을 가진 안티세력들은 000 닷컴을 만들어 연예인이나 유명인을 상대로 마치 사회정의를 구현하듯 집단적 안티운동을 벌이고 있다.

 

  문제는 안티세력들이 만들어 내는 담론이 지극히 사적인 주장들이며 그 대상에 대한  비난이 대단히 폭력적이라는 데에 있다.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비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의 증폭과 유포로 개인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익명이라는 그늘에 숨어서 저지르는 다수의 비겁한 횡포이며 범죄이다.   

 

  익명의 다수들이 저지르는 개인에 대한 폭력.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문제는 이렇게 집요한 악플러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며 친구이고 바로 지금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일수 있다는 사실이다.

 

  작년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은 '정의'라는 추상적 담론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해 놓은 인문학 서적이다. 언론에 의하면 인문과학 서적이 베스트셀러 1위가 된 것은 한국 출판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얼마나 한국 사회가 정의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있으며 동시에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정의에 갈급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국 사회에서 정의라는 가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공공적 의미의 정의는 거의 사라져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화된 검찰의 파워는 정의를 불의로 갈음하여 만인 앞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법정신 심각하게 훼손시켜 버렸다. 검찰에 의해 저질러지는 불의는 이미 한국 사회의 국민에게 일반화 된지 오래다.

 

  뿐만 아니라 위정자들은 오로지 국민들에게만 정의를 강제하고 있다. '법치'를 내세워 국민들의 정당한 주장에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여, 과도하고 폭력적인 공권력을 앞세워 무참하게 무찌르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이 저지른 비리와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또한 분배의 불평등으로 인해 재벌들은 갈수록 살찌고 힘 없는 국민들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담보로 세상을 살아 갈 수 밖에 없다. 

 

   이들을 견제해야할 언론은 이미 막강한 권력이 되어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위해 선전 선동하며 반대 계급에 대한 왜곡을 일삼고 있다. 한국은 이미 계급사회에 진입했다. 특권층과 국민이 누리는 사회적 정의는 판별이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힘 없는 인민은 불에 타죽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수 백미터의 기중기에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걸고 생존권을 외치고 있다. 가난한 인민은 교육에서 차별 당하고 대학을 다닐 수도 없다. 강요된 천민자본주의적 서바이벌 게임에서 탈락자는 늘 힘 없는 인민이다. 봉건시대 계급사회에서나 가능한 일들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공공의 정의가 사라진 사회에 사적 정의만 남았다. '공적인 정의'의 부재로 불공정과 불의가 일반화 된 사회에서 힘 없는 개인은 늘 피해자일 수 밖에 없다.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이제 사적인 장치로만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사적 정의를 실현할 좋은 도구는 인터넷이다. 익명성이 보장되며 개인의 숨겨진 울분을 해원하는 동시에 개인의 뭉쳐서 익명의 집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적 정의의 실현을 제어할 메뉴얼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악플러는 결코 스스로 악플러임을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사적 정의를 집행하는 사람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자신들의 행위는 '진실'을 알리고 찾는 숭고한 노력이며 거짓과 위선을 까발리는 '정의'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남긴 악플에서 잃어버린 공공의 정의를 대리하여 집행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악플이 바로 정의의 실행이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라고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악플러 안티세력이라 불리는 사람들 역시 한국 사회의 상실된 정의가 만들어 낸 희생자 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