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우아한 독설

홍상수는 맞고 홍상수는 틀리다.

zamsi 2016. 6. 22. 17:19





남녀 관계에는 이유를 불문하고 '3자 개입금지'라는 것이 지금까지 지켜 온 철칙이다. 워낙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라 호사가들처럼 입방정을 거드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이유는 홍상수와 김민희의 스캔들이 사회적 현상으로 되짚어 볼 만한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시공을 막론하고 세상 모든 불륜은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어왔다. 곧잘 문학이나 영화에서 소위 아름다운 불륜을 포장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불결하고 비윤리적이며 심지어 인간성까지 더러운 종자라는 악머구리를 면할 수 없다. 아름다운 불륜이란 성립 불가능한 형용 모순이며 용서받지 못할 주홍글씨다.

 

그런데 이러한 공식을 되짚어 생각하면 불륜은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내포되어 있다. 현실에서 불륜과 사랑은 결코 합치될 수 없는 이질적 가치다. 우리 사회에서 사랑이라는 의미를 정확히 개념화시킬 수 없는 이유는 사회적 규범이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사랑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규범은 사랑은 순수해야만 하며 그 순수함은 윤리적이고 헌신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순수하지 못한 사랑, 헌신적이지 못한 사랑, 비윤리적인 사랑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대저 무엇이 순수한 사랑이고 무엇이 불결한 사랑인가?

 

남녀 간의 사랑은 사회적 통념을 떠나 지극히 개인적 욕망이다. 기실 한 인간이 이성을 사랑하고 욕망하는데 있어 도덕과 윤리와 헌신이 크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처럼 시나브로 나타난다. 다만 이성이라는 이름, 윤리라는 이름으로 그 사랑과 욕망을 숨기거나 억제할 뿐이다. 개인의 사랑이 사회적 규범과 맞설 때 개인의 사랑은 치명상을 입는다. 불륜이라는 이름에 대한 사회적 금기는 한 인간이 감히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완력을 행사한다.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불륜의 대상자는 매장되고 만다. 우리사회는 사인 간의 사랑보다는 도덕과 윤리가 우선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공적 개념으로서만 존재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제법 좋아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좋아할 것이다.(그가 영화를 만든다면)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내면의 위선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인간 내면의 위선을 드러내는 도구로 섹스를 앞세운다. 인간에게 내재된 성욕은 동등하다. 난 대통령의 성욕과 노숙자의 성욕은 동등하다고 믿고 있다. 홍상수는 일상의 사랑 속에 성욕을 개입시킨다. 우리는 본능을 숨긴 채 이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이성은 사회적 통념과 결부되어 개인이 지켜야하는 미덕으로 치부된다. 그리고 그 이성을 져버리고 본능에 충실할 때 남녀고하를 막론하고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되고 만다. 홍상수는 본능을 감추고 사는 현대인의 이성을 위선이라고 조롱한다. 그 조롱이 하도 노골적이어서 위악적으로 보이기 까지한다.  

 

그런 홍상수가 영화 화면을 찢고 현실로 나왔다. 자신이 조롱했던 위선의 가면을 벋어버리고 본능을 선택했다. 난 세간의 비난과 상관없이 홍상수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게 사랑이든 정욕이든 상관없다. 홍상수는 평생 이뤄 온 모든 명예를 벗어던지고 자신이 고집하는 사랑을 선택했다. 그런 점에서 홍상수는 적어도 자신의 영화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처럼 속물적이지는 않다. 내가 만약 여자라고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선택하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본능을 이성으로 쉽게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 불행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욕망은 본능이다. 사랑 또한 욕망이다. 사회적 규범과 맞서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면서까지 차마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운명 같은 힘이 사랑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