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한씨연대기

한명숙에 대한 오해와 진실1

zamsi 2009. 8. 4. 05:31

1. 한명숙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부유한 사람이다?

  

  한명숙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드는 인상비평이 부잣집 마나님이다.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았을 것 같이 포근한 얼굴이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주위 사람들을 따뜻한 손으로 잡아 줄 때면 평생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묻이고 살았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한명숙은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소위 말하는 부자로 살아 온 적이 없다. 어려서는 빈민에 가까웠으며 나이 들어 서민으로 살다가 늘그막에 겨우 이사 걱정 없이 집 한 채 지니고 사는 게 재산의 전부다. 하지만 그 집 마저 갚아야할  융자금이 남아 있다.  


  한명숙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던 집안의 6남매 중 맏딸로 자랐다. 날 때부터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한명숙 부모님은 모두 북한 평양이 고향이다. 아버지는 당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평양의 종합병원 수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유복했으며 단란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인해 가족의 윤택한 삶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전쟁이 나고 모두들 살길을 찾아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갈 때 한명숙의 부모님도 평양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 왔다.  ‘한 달만 피해 있다가 돌아오면 평온해 질 거다’란 생각에 집문서며 값나가는 패물을 항아리에 넣어 마당 한구석에 땅을 파서 깊이 묻고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집을 떠나셨던 한명숙의 부모님은 그 후로 두 번 다시 평양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 때 한명숙의 나이 다섯 살이었다.


평양에서 서울로 내려 온 한명숙 집안의 삶은 여느 월남가족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서울 땅에서 돈 한 푼 없이 살아가기란 담벼락을 맨 손으로 기어오르는 일처럼 힘겹기만 했다. 이어지는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빚보증으로 살림살이는 날로 쪼들려 갔다. 어린 한명숙은 일 나간 부모님을 대신해 집 안 일은 물론이며 어린 5남매의 동생들을 키워야만 했다. 산동네 비탈진 언덕길을 물지게를 지고 오르며 세상을 사는 이치가 힘이 아닌 균형이라는 것을 배워야 했던 어린 한명숙. 


하지만 그녀의 간난신고는 결혼이후 더 심해진다. 한명숙은 결혼 후 6개월 만에 독재정권의 강압수사로 남편을 감옥에 빼앗기고 13년 반을 생과부로 살아왔다. 그 13년 반 동안 남편의 옥바라지는 물론 다섯 동생을 교육시키고 먹여 살리는 실질적 가장 노릇을 해왔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동생이 불합격했으면 좋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그 힘든 와중에도 한명숙의 다섯 동생 모두는 대학을 졸업할 정도로 자신들의 삶에 성실했다. 또한 비록 생활은 가난했지만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집 안은 늘 웃음이 가시지 않을 정도로 화목했다.  


남편이 13년 반 만에 출옥해서 다시 늦은 신혼을 살았지만 가난은 가시지 않았다. 마흔이 가까운 늦깎이 신혼부부가 다시 살림을 시작한 곳은 부엌도 없는 사글세 단칸방이었다. 이후 지하에서 옥탑방까지 한명숙은 한국의 모든 전셋집을 섭렵할 정도로 서민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절약과 검소는 몸에 밴 습관이었다. 한명숙의 부군 박성준 교수는 아직까지도 티슈의 한 조각을 다 쓰지 않는다. 반 조각이면 충분하다고 반을 찢어서 쓰고 있다. 한명숙 역시 겨울에도 거실 난방을 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지 않는 거실에 굳이 기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총리를 마친 후 한 번은 집안에서 언론사 인터뷰가 있었는데 미처 거실을 데워 놓지 못해 기자에게 손수 실내화를 꺼내주며 미안해했다.


평생을 가난과 더불어 살다 보니 극도로 허례허식을 싫어해 총리시절 공관에 드는 꽃 치장을 없애고 그 비용을 공관을 지키는 경찰들 부식비로 지급하게 했다. 총리 공관을 지키는 경찰들은 한명숙 총리시절 만큼은 맛있고 넉넉한 식사를 제공 받을 수 있었다.


언젠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명숙 부부의 살림살이에 대해 기자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두 번의 장관과 총리까지 지내셨는데 이렇게 검소하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질문을 듣고 빙긋 웃음을 머금고 있던 한명숙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제가 어때서요? 저는 그동안 모은 월급으로 어렵게 이 집을 사고 그나마 윤택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장관과 총리를 해서 재산이 많아졌다면 그거야 말로 부끄러운 일이지요.”


 한명숙이 부잣집 마나님처럼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가난과 민주화 운동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문과 옥살이를 거치고서도 저토록 온화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을 향해 부끄러움 없는 당당한 삶, 그러한 자신감이야 말로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최선의 풍요이자 최고의 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