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한씨연대기

왕따 정치인 한명숙

zamsi 2009. 8. 7. 18:51

한명숙에 관한 오해와 진실2.


한명숙은 관운이 좋은 사람이다?

                              - 왕따 정치인 '한명숙' -


  다른 정치인에 비해 유독 한명숙에게만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억세게 관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이다. 기실 따지고 보면 그리 생각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지 싶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례대표로 민주당 의원을 하다 국민의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여성부 장관으로 발탁 된다. 일반적으로 여기까지만 올라도 출세했다는 평을 듣기 일쑤다. 그런데 참여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제꺼덕 환경부 장관으로 취임한다. 한 번도 하기 어려운 장관을 두 번씩이나 그것도 연속으로 해버린다. 그리곤 일 좀 하는 가 싶더니 이번에는 장관직을 때려치우고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떡하니 당선되어버린다. 마지막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발탁되어 관료로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위치에 서버리고 만다.


야! 참 억세게도 운이 좋다. 그야말로 승승장구 출세의 길을 땀나게 달려 온 사람이다.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이건 좀 아니지 싶다. 배가 아프고 배알이 뒤틀린다. 만약 이 모든 것을  운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이건 좀 불공평하다. 한명숙만 이렇게 운이 좋아도 되는 것인가. 우린 평생을 살면서 고작 잘해야 한 두 번의 대운과 만날 수 있다.


    비례국회의원 → 여성부 장관 → 환경부 장관 → 지역구 국회의원 → 국무총리


이 모든 것이 하루도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확률로 따져보더라도 이건 기적이 아닌가? 이 양반이 대저 무엇이 관대 이토록 연속 로또를 팡팡 터트릴 수 있단 말인가?


그 해답은 의외로 쉽다. 한명숙의 승승장구 뒤에는 운이 아닌 철저한 자기관리와 실력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또한 투철한 사명감과 성실성이 밑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다.

 

운이 아니고 실력이라고?

그렇다. 한명숙의 승승장구는 결코 운이 아닌 실력이다. 만약 한명숙에게 실력이 겸비되지 않았다면 위에 언급된 상황을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단순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까?  거기에는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하는 한명숙의 개인적 성향도 한 몫하고 있다. 쉽게 말해 한명숙은 언론플레이에 능숙하지 못하다. 하지만 이 보다 더 큰 이유는 한명숙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편견에 있다.


예컨대 한명숙의 관료 이력과 비슷한 사람이 또 한 명 있다. 고건 전총리가 그렇다. 한명숙과 똑같이 장관과 서울시장 그리고 총리까지 역임했다. 그는 평생을 주류로 살아왔다. 하지만 우린 고건에게 ‘관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 대신 ‘행정의 달인’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이렇게 판이한 평가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여기서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또한 폄훼 당하고 있는 정치인 한명숙을 발견하게 된다. 한명숙에겐 소위 말하는 ‘정치판 짬밥’의 경력이 없다. 정치판이라는 배타적인 동네에서 무시당하기 딱 좋은 경력이다. 비록 한명숙이 여성 사회운동사에서 대모 소리를 들었다하더라도 그러한 경력을 제대로 쌩까버리는 동네가 바로 정치판이다. 우리는 시민사회운동 경력을 밑천 삼아 정치권으로 편입되었다가 한 순간에 망가져 사라져버리는 숱한 명망가들을 지켜봐왔다. 정치 바닥, 보기보다 만만치 않다. 대부분의 정치인이 우습게 보이지만 자기들만의 생존본능을 지키는데는 그 어떤 집단 보다 살벌하며 철저하다.


이러한 양육강식의 정글에서 한명숙이 등 기대고 비빌 언덕은 거의 없었다. 재야로 대표되는 운동권이 우군인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 한명숙이 비집고 틀어갈 틈바구니는 없었다.


김근태를 위시한 재야 운동권의 자칭 명망가들이 이미 정치권의 엘리트로 자부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강고하게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표면상 한명숙을 내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명숙을 제대로 인정했다고 볼 수도 없다. 어찌 보면 이들 역시 한명숙을 철저하게 냉대했다고 봐야할지도 모른다. 재야 운동권 출신의 정치인들이 마지막까지 노무현 대통령을 무시한 처사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 어떤 그루터기도 없이 혈혈단신 자신을 추슬러야 했던 한명숙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이 맡은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한명숙은 자신이 이토록 큰 정치적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이해하는 지인들과 친구들 심지어 그의 가족들까지도 한명숙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기만 했다.  

  

한명숙을 인정한 두 사람의 지도자

그런 한명숙을 눈여겨 본 사람이 두 명 있다. 한 명은 정치 9단이라 불리는 김대중 대통령이었고 또 다른 한명은 자신이 차기 대통령을 지명할 권리가 있다면 한명숙을 지목하겠다고 말씀하신 고 노무현 대통령이다. 


무시당할 정도로 평가절하되던 한명숙을 누구보다도 인정하고 그녀의 정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인물이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지도자 김대중과 노무현이었다.


한명숙이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있을 무렵 김대중 대통령은 한명숙에게 정치 입문을 권유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첫 번째 권유를 한명숙은 정중히 고사한다. 정치에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세 번째 대선도전에 실패하고 정치 은퇴를 선언한 후 영국으로 떠나간다. 한명숙도 남편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돈이 많아 유학을 간 것이 아니다. 장학금으로 학비를 조달받고 생계를 위해서 게스트 하우스의 이불 빨래와 방청소를 해야 하는 고달픈 유학생활이었다. 하지만 한명숙은 타고 난 낙천성과 성실함으로 이를 이겨내고 최선을 다해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마지막 박사과정 논문 통과만 남겨 놓았다. 바로 그 무렵 한명숙은 인생에서 가장 큰 변곡점과  만나게 된다.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대통령이 한명숙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대선 도전을 위해 여성계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던 한명숙이 꼭 필요했다. 한명숙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노정객의 곡진한 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부탁을 받아들인다면 그동안 공부해 온 과정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한명숙은 정말이지 입안이 짓무를 정도로 고민했다고 한다. 주변의 지인들과 친구 가족까지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명숙은 분명 정치권에서 자신이 할 일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을 두 번씩이나 찾아 준 김대중 대통령의 안목을 믿었다. 결국 한명숙은 박사과정을 코 앞 에 둔 시점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정계진출을 결심한다. 


이후 한명숙은 남편과 아들을 남겨둔 채 달랑 작은 배낭하나 메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귀국하자마자 한명숙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시장으로 달려가 정장을 사 입는 일이었다. 돌아온 바로 그날이 새천년민주당 발기인 대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생 한명숙에겐 행사에 입고 나갈 변변한 옷 한 벌 조차 없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한명숙

이후 한명숙은 새천년민주당 여성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비례대표로 16대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자 초대 여성부 장관에 임명된다. 당시 여성부는 각 부처에서 파견된 공무원 102명으로 구성된 초미니 부처였다. 새로 생긴 부처이다 보니 모든 조직을 새롭게 만들어야했다. 더구나 다른 부처에서 파견 나온 공무원들은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실무자들이 여성부의 성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부처의 손발을 맞추기 이전에 공무원들의 재교육부터 필요했다. 한명숙은 서두르지 않고 이 모든 일을 차근차근 진행시켜 나갔다. 


그리고 한명숙은 결국 무에서 유를 창조해 냈다. 조직의 기틀을 새롭게 만들고 실무자들을 독려하여 여성문제의 전문가로 만들어 냈다. 또한 여성들에 대한 편견과 따가운 시선을 이겨내고 명실공이 정부를 이끌어가는 한 축으로써 여성부의 위상을 확립했다. 한명숙은 이를 바탕으로 모성보호 관련 3법의 제정을 시도했다. 모성보호 관련 3법이란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고용보험법을 포함하는 일하는 여성 근로자들의 권익을 밑받침하는 가장 근본적인 법이었다. 한명숙은 정부를 설득하고 재계와 타협하면서 아무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라던 모성보호 관련 3법을 결국 국회에 통과시켰다. 그 결과 지금 모든 직장 여성들이 누리고 있는 산전산후의 휴가 기간이 60일에서 90일로 대폭 늘어났다.


또한 여성채용목표제를 성사시켜 여성들의 고용을 법적으로 보장하도록 만들었다. 채용목표제란 여성의 사회, 공직 진출을 위해 공무원을 임용할 때 일정비율을 여성으로 임명하는 것이다.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활발한 북유럽을 비롯해서 선진 여러 나라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뒤늦게라도 우리나라 여성들의 고위직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 셈이었다.


한명숙은 마치 신명 내린 무당처럼 열심히 일했다. 그 결과 국민의 정부 마지막까지 김대중 대통령과 임기를 마친 유일한 장관이 한명숙이었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이 얼마만큼 한명숙을 신임했는가를 알 수 있는 증거이기도하며 한명숙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확인시켜주는 사건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국민의 정부가 마감되고 참여정부가 시작되자마자 한명숙은 다시 환경부 장관으로 차출된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이임식과 취임식을 같은 날 함께 치른 유일한 장관이 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해수부 장관시절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는 한명숙을 눈여겨보다 정권 출범과 동시에 한명숙을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면서 지난 정부의 각료를 쓰고 싶은 통치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정부의 각료를 쓰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어떤 지도자 보다 원리 원칙에 또렷한 노무현 대통령이 환경부 장관으로 한명숙을 임명한 이유는 한명숙의 자질과 능력을 아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한명숙은 노무현 대통령의 이러한 믿음을 배신하지 않고 환경부에서의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낸다. 환경부는 그 어떤 부처보다 민원이 많고 분쟁이 많은 부처이다. 환경보호의 논리가 여타 부처의 개발논리와 항상 부딪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환경부 직원들은 지쳐있고 주눅 들어 일에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한명숙이 장관을 맡고 나서 환경부가 바뀌기 시작했다. 모래알 같던 조직은 단단해지고 일에 대한 적극성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한명숙은 상명하달의 수직적 의사구조 체계를 수평적 조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일방적이 아닌 쌍방향성의 대화와 토론이 조직을 서서히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정부업무평가에서 환경부 설립 이후 처음으로 최우수 부처로 선정되었고 <중앙일보>의 장관 리더십 평가에서도 한명숙은 1위를 차지했다.


일 잘하는 환경부 장관으로 지내고 있을 무렵 한명숙에게 또 한 번의 인생의 전환점이 기다리고 있었다. 관료로서 자신의 몫을 충분히 다해내고 있던 한명숙에게 17대 총선 차출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장관을 접고 국회의원에 출마 하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부탁을 받은 것이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서른 석이 겨우 넘는 초미니 여당이었다. 당이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선거의 바람을 일으킬 이름 난 명망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명숙은 다시 한 번 갈림길에 서야만 했다. 하지만 당에서 선정한 지역구는 한나라당의 텃밭이라 불리던 일산이었다. 일산은 고양시의 분당으로 불리며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 패배한 민주당의 무덤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한나라당의 거물, 5선 의원 홍사덕이었다.


분명 부담스러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왕 정치인으로 재출발을 하는 마당에 상대적으로 당선이 훨씬 쉬운 지역구를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명숙은 선뜻 이 제의를 수락한다.

당시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곁에서 한명숙을 지켜보던 이창동 감독은 그 때 한명숙의 결단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이(한명숙)는 지역구 출마를 권고 받았다. 그리 승산이 있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나가기 위해서 장관직을 물러나야 했지만, 내가 곁에서 지켜본 그이는 그 결정을 내리는 데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유는 ‘내가 필요하다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그 과단성이 부럽기도 했지만, 또한 그 순결한 용기가 대체 어디에서 나 온 것일까 궁금했었다.   

    

무모해 보일 정도의 순결한 용기로 한명숙은 선거 한 달을 남겨두고 일산에 깃발을 들었다. 그리고 한명숙 답게 최선을 다했으며 역시 승리했다. 물론 탄핵바람이 승리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였지만 한명숙이 아니었다면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선거가 끝난 후 상대당 홍사덕 후보마저 한명숙 후보는 정말 약점이 없는 후보였다고 술회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부드러운 힘

이후 우리가 잘 알듯 한명숙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총리가 된다. 국민 대부분이 한명숙의 총리 임명을 환영했다. 총리 비준 청문회가 열렸지만 맥없는 정치 공방으로 끝나버렸다. 한나라당의 청문위원들이 한명숙을 좌파로 몰아 상처를 내려했지만 한명숙의 “자신을 고문했던 사람들을 모두 용서했다”는 말 한 마디로 사실상 청문회를 마감시켜버렸다. 


한명숙이 총리로 재임하던 시절 참여정부의 가장 민감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던 상황이었다. 평택 대추리가 그랬으며 한미FTA 비준 문제가 정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민감한 상황에서도 한명숙 총리 재임시절이 참여정부 5년 동안 가장 안정적인 기간이었다. 갈등을 화합으로 만들어 내는 한명숙의 부드러운 힘이 발휘된 것이다. 한명숙이 총리를 퇴임할 무렵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 광화문 청사에 일어났다. 수많은 공무원들이 눈물을 흘리며 퇴임하는 총리 한명숙의 품에 안겨온 것이다. 이런 한명숙에게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 최상의 총리’ 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명숙은 결코 장악하지 않는다. 다만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화합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가 관계된 모든 조직은 화합의 부처로 변신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한명숙은 ‘화합의 전도사’라고 불리었다. 그러한 한명숙의 부드러움이 흑과 백만이 존재하는 극한의 쟁투를 일삼는 정치게임에서 잘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이유로 한명숙은 늘 부드러운 사람으로만 인상지어져 있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종국에 가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한명숙은 언제나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조용하고 묵묵히 세상의 변화를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그 조용한 부드러움이 한명숙을 두 번의 장관과 국회의원 그리고 총리를 만들어 온 힘이다. 한명숙의 그 힘은 세상을 압제하는 힘이 아니라 불신과 단절 그리고 갈등과 반목을 걷어내는 소통과 화합의 힘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겐 한명숙의 부드러운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