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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에 대한 오해와 진실 3

zamsi 2009. 8. 18. 09:36

한명숙에 관한 오해와 진실 3



한명숙은 리더십이 없다?

 


“총리가 인자한 표정으로 ‘안살림’과 ‘설거지’에만 주력한다면 사람들은 실망할 것이다. 빠른 시일 안에 공직사회를 장악해야 한다.”

                                                                          - 한명숙 총리 취임 당시 모 신문 사설 -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한 총리의 호소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법 시위대에게 ‘이해해 달라’는 식의 설득이 과연 이번 사태 해결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 든다.”

 

                              - 대화를 통한 평택 대추리 해결을 주장하는 한명숙을 비판한 모 신문 사설 -


    윗글은 한명숙이 총리시절 초기 언론에게 듣던 말들이다. 비단 언론뿐만 아니라 거개의 사람들은 ‘한명숙은 우유부단하다’,  ‘부드럽기만 하여 조직을 장악하지 못한다.’ , ‘정치적 리더십이 없다.’ 라고 평한다.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만 본다면 세간의 이러한 평가는 옳다. 하지만 평가의 기준은 옳지 못하며 공정하지도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자의적인 평가 기준으로 한명숙이라는 정치인을 가늠한다. 한국 정치에서 ‘카리스마’라는 말은 곧 리더십을 뜻한다. 카리스마가 없으면 리더십이 없는 것이다. 한국 정치 지도자가 갖추어야할 가장 큰 덕목은 바로 카리스마다.


하지만 한명숙에게는 한국정치가 요구하는 카리스마가 없다. 그렇다면 한명숙은 한국 정치지형에서 지도력이 없는 정치인이란 말인가?


강퍅한 한국정치 지형의 이단아

 ‘카리스마’라는 단어의 뒷면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권위’라는 말이 숨겨져 있다. 한국정치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발전해 왔다. 그 과정에서 리더의 권위와 하급자의 상명하복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대명률처럼 여겨져 왔다.


군사독재 시대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지도자는 전쟁을 지휘하는 수장이었다. 상대 진영은 대화의 상대가 아닌 무찌르고 섬멸해야할 적이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실존적인 문제 앞에서 부드러움과 타협은 조직을 위해 배격되고 타파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타협은 절충이며 토론에 의해 만들어 질 수 있는 중용적인 의미를 지닌 가치 중 하나다. 하지만 지난 시절 군사독재와의 싸움에서 ‘타협’은 변절을 의미하는 배신의 아이콘 이었다.


투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온 한국 정치. 하지만 이를 비판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역사가 민주주의를 성장시키는 과정이었으며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지난한 쟁투를 거쳐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완성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21세기가 지난 현 시점에서도 한국 정치는 여전히 강퍅하고 성마르다. 흑백논리만 난무하고 토론을 통한 타협이 비집고 들어 갈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투사형 정치인은 여전히 주목받고 있다. 윽박지르거나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정치인이 소신 있는 그리고 정치적 리더십이 있는 사람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저간의 평가가 정치인 한명숙을 소신이 없는 또는 지도력이 없는 정치인으로 낙인 찍어버리는 이유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간의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한명숙이라는 정치인이 국민 속에 우뚝 서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우유분단하고, 부드럽기만 하고, 조직을 장악하는 지도력도 없으며 정치적 리더십도 없는 한명숙이 국민 앞에 커다란 정치인으로 부각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사람들이 정치적 지도력이 없다고 손가락질 하면서도 한명숙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유일하게 한명숙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정치력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눈으로 한명숙의 정치력과 리더십을 바라보아야 한다. 투쟁과 장악의 리더십이 아닌 조직과 하나가 되고 국민과 하나가 되어, 조직과 국민을 이끌어가는 한명숙이 만들어 내는 ‘어울림의 리더십’을 재조명해야 한다.  


나는 결코 장악하지 않는다.

한명숙은 결코 조직을 장악하지 않는다.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조직에 수평적이고 쌍방향적인 토론의 문화를 만들어 낸다. 장악에 의해 조직을 움켜쥐는 리더십이 아닌 대화와 타협을 통해 조직을 보듬어 안는 리더십이 바로 한명숙이 만들어 내는 리더십이다.


한명숙이 총리로 취임하던 날이었다. 이전까지의 총리 취임식은 취임하는 총리가 단상에 앉고 모든 공무원이 서열대로 줄지어 서서 총리의 취임사를 듣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한명숙이 총리로 취임하는 그 날은 달랐다. 먼저 취임식에서 장·차관, 직원들과의 자리 서열을 없애버렸다. 참석자들은 오는 순서대로 아무자리에 앉으면 그만이었다. 그것은 파격이자 격식의 파괴였다. 공무원 사회에서 서열은 곧 자리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 날은 장 ․ 차관과 하급 공무원이 뒤섞여 앞뒤를 가리지 않고 뒤섞여 앉게 되었다. 실제 늦게 도착한 당시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은 거의 뒷줄에 앉아야만 했다. 그리고 총리 취임사가 시작되었다. 단상이 아닌 앞줄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한명숙이 일어나 뒤돌아섰다. 그리고 무선 마이크를 든 채 취임사를 시작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총리가 서고 공무원이 앉는 취임식이 연출된 것이다. 새로운 한명숙만의 리더십이 순항하는 순간이었다. 한명숙은 예의 그 음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느 신문은, “첫 여성 총리 한명숙, 부처 장악력부터 증명해야”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더군요. ‘장악력’의 ‘掌握’이란 “손아귀에 꽉 쥔다.”는 뜻이지요. 여성인 저에게는 그런 손아귀의 힘은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리더십’과 ‘장악력’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등식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여러분에게, ‘장악’이라는 컨셉을 버리자고 제안하겠습니다. 내 이익, 우리 부처의 이익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그런 ‘장악’을, ‘부처 이기주의’를 놓아버리자는 것입니다. 내 이익, 내 부처의 이익을 먼저 챙기고 거기에 얽매인다면, ‘국민의 평안과 행복’은 안중에 없게 됩니다.


한명숙은 욕심을 버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장악하기이전에 먼저 수그리고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몸에 밴 겸손이 한명숙의 삶을 지탱해 온 힘이었다. 여성운동을 하던 후배들은 그들의 대모 한명숙을 ‘설거지 한명숙’으로 불렀다. 이유는 어떤 행사가 벌어지던 끝까지 남아 조용히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것은 늘 한명숙이었기 때문이다.


한명숙은 여성부 장관 시절 여성 관련법을 개정할 때 지독히 보수적이고 반여성적인 발언을 한 의원을 만나면 화를 내기는커녕 두 손을 꼭 잡고 90도로 인사를 하면서 ‘이번에 꼭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반대자에게도 머리를 수그릴 줄 알고, 목표는 분명하나 태도는 늘 겸손함을 잃지 않던 정치인이 바로 한명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력과 리더십이 국민 속에 한명숙을 있게 한 근원적인 힘이다.


투쟁을 통한 수직적 리더십은 과거형 리더십이다. 세상은 변하고 세계도 변하고 우리도 바뀌어야 한다. 한국의 미래는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 사회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일방적이 아닌 쌍방향적이며 다양성이 존중 받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십은 장악하지 않는 함께 참여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미래형 리더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