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한씨연대기

한명숙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zamsi 2009. 8. 27. 12:23

한명숙에 대한 오해와 진실4.


한명숙은 정치적 소신이 또렷하지 않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 헤세의  ‘데미안’ 中 -


한명숙은 자신의 알 속에서 나와야 한다. 일반적으로 흔하게 듣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한명숙의 알은 무엇이며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무엇일까? 그리고 정말 한명숙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알을 깨어 내고 창공으로 웅비하는 힘찬 날개 짓을 할 수 있을까? 


빨갱이와 유한마담

유력 정치인 중에 한명숙 만큼 극단의 평을 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수세력(기실 극우세력)은 한명숙을 좌파 중에서도 극좌, 소위 말해 빨갱이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한명숙의 남편 박성준 교수는 재수 없게 불온서적 몇 권을 빌려 읽었다하여 ‘통혁당 사건’에 뚤뚤 말려 15년 형을 언도 받았다. 물론 무자비한 고문이 뒤따른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극우의 시각에서 고문, 은폐된 진실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선고를 받았으면 무조건 빨갱이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낙인 찍힌 주홍글씨는 평생 동안 이어진다. 또한 그 가족들이 사회로 받는 냉대와 고통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한명숙은 그 엄혹한 시대에 법적으로 남남인, 미처 혼인신고도 하지 못한 남편을 무려 13년 6개월이나 기다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유신독재와 싸워왔다. 그리고 한명숙 역시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중정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된다. 깊은 신앙심을 가진 한명숙 조차 고문 당시에는 죽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한명숙은 미니 자서전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온 몸이 꽁꽁 묶인 채 밤새도록 구타를 당했다. 밤과 낮을 구별할 수 없었고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온 몸은 피멍이 들어 부어올랐고 부은 피부는 스치기만 해도 면도날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귓전에 울려오는 욍욍거림 속에 나를 고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아스라하게만 들려왔다. 셀 수 없을 만큼 정신을 잃었고 차라리 그 순간이 행복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고문의 고통보다 더 크게 나를 짓눌렀다.  그들이 나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빨갱이’임을 실토하라는 것이었다.”


한명숙은 ‘크리스찬 아카데미’사건으로 2년 반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우리나라 정치 역사상 처음으로 남편과 아내가 정치범으로 동시간대를 감옥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한명숙은 출옥이후에도 재야와 시민단체 여성계를 아우르는 활동으로 독재정권과 맞서 싸워왔다. 국회에 들어와서도 2004년 여당 내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안을 공동발의했고, 여야 합의로 통과된 과거사법에 대해서는 원안보다 후퇴했다는 이유로 찬성당론을 거부하며 기권했었다


이러다 보니 극우들 눈에 한명숙이라는 인간은 의심할 수 없는 좌빨 그 자체이다.


그러나 진보개혁진영에서는 한명숙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라진다. 강단 없으며, 우유부단하고 정치적 소신이 또렷하지 않는 정치인이라고 폄하되고 있다. 이러한 진보개혁진영의 평가는 한명숙을 열린우리당 중앙상임위 선거에서 꼴찌를 만들었고 2007년 대선 경선에서 충분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낙마시켜버렸다. 


그러나 2007년 대선 경선에서 한명숙은 개혁진영의 단합을 위해 이해찬과의 후보 단일화를 선택하는 결단을 보여주었다. 혹자들은 그러한 한명숙의 경선 후보사퇴에 대해 역시 강단 없는 한명숙이라고 말하지만 우리 정치사상 한명숙 만큼 깨끗하게 후보 사퇴를 결행한 정치인은 없었다. 한명숙은 당시 이해찬과의 후보 단일화를 결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결정은 내가 죽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일이 분명하기에 기꺼이 후보 단일화를 받겠습니다.” 

 

그리고 한명숙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이해찬을 위해 뛰었고 이후 정동영으로 후보가 결정되자 발이 붓도록 정동영 후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3김 정치이후 정치적 리더십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로 이제 이 땅에 3김 정치가 대단원의 장막을 내렸다. 3김 정치는 우리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에 대한 평가는 후세의 사학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 중 하나는 3김 정치로 대변되던 투쟁의 리더십이 유지되어 우리 정치를 계속 이끌어 간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실로 어둡다는 사실이다.


투쟁의 리더십이 민주화의 과정에서 원심력이 될 순 있었지만 형식적 민주화의 완성이후 우리 사회를 갈등과 분열로 이끄는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더 나은,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한명숙이란 정치인은 그동안 갈등과 분쟁이라는 정치판의 틀에서 저평가되고 부당하게 차별 받아왔다.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 그녀에게 투쟁적인 요소가 없다는 이유, 그녀가 적마저 감싸 안는 온화한 성격이라는 이유로 한명숙 만이 가지고 있는 소통과 화합의 지도력이 인정받지 못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명숙은 투쟁 일변도의 강퍅한 정치 현실 속에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또렷하게 지켜왔다.


 

지금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된 대한민국에서 소통을 통한 화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많은 국민들이 한명숙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갈등의 정치가 아닌 화합하는 정치를 국민은 원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한명숙이라는 정치인에게 투사하기 시작했다. 그 어떤 정치인들 보다 국민이 먼저 한명숙의 정치적 리더십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명숙은 새롭게 알을 까고 세상과 소통하려하고 있다. 더디지만 변하지 않은 충심과 결단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제 우리는 한명숙을 주목해야 한다. 그 이유는 역사의 흐름과 한명숙의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이 정확하게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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