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우아한 독설

내 친구는 게이입니다.

zamsi 2010. 9. 30. 15:24

내게는 아주 오래된 친구가 하나 있다. 

이 녀석 살아 온 삶이 참 아프다. 

하느님께 자신을 헌신하겠다고 신학대를 갔다.

그리고 수사가 되어 수도자 생활을 하다 환속하여 작은 주점의 사장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꽤나 친해서 죽이 잘 맞던 친구다.

수도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녀석과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섬세하고 다정하며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속  깊은 친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녀석과의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듣는 소문에는 수사가 되어 이태리로 유학을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었다.

그 녀석과 다시 만난 것은 10여 년이 지나 나이 서른이 넘어서 였다. 

 

수사를 중도에 포기하고 대학로에서 작은 주점을 열고 있었다.

선배들과 함께 찾은 주점에서

녀석은 "주를 모시다가 이제 주에 의지해 주를 팔고 있다" 고 눙쳤다.

 

주점은 선후배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고 장사도 꽤 잘 되는 듯 싶었다.

녀석은 여전히 조신하고 선후배를 따뜻하게 챙겨주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늘 사람의 뒤에서 따뜻하게 웃음 짓던 좋은 친구였다.

 

사는 게 번잡하다보니 녀석과 다시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다.

대학로 주점은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고 아무도 녀석의 행방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은 어물쩍 10년을 훌쩍 넘어가 버렸다.

 

어느 날 모르는 전화번호가 한 통 떴다.

'여보세요'라는 첫 마디에 난 녀석임을 직감했다.

여전히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삶에 찌든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이 풍겨나는 아픔이 진하게 느겨졌다.

 

 

우리는 막걸리를 앞에 두고 다시 만났다.

꽤나 미소년이었던 얼굴은 온데 간대 없고 털 복숭이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맞잡은 손이 너무도 투박하고 거칠어 부드러운 내 손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두런두런 지난 얘기며 살아 온 이야기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한 것 같았다.

친한 친구에게 빚보증을 잘못 서 거의 알거지가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잃은 돈 보다 친구를 잃게 되어 더 슬프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 때까지 난 녀석이 말한 '친구'의 의미를 몰랐다.

 

술병이 몇 병 비고 나도 취하고 녀석도 취했다. 

왜 그런 순간이 있다. 대화를 하다 뚝 끊기는 찰라.

희희낙락 떠들어 대다가도 아주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사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찾아 온 침묵이 버겁다는 듯

녀석이 나를 찬찬히 바라보더니  아주 무덤덤하게 말했다.

 

" .... 나 게이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는 마치 혼자 뇌까리듯 무심한 독백이었다.

미안하지만 많이 놀랐다. 이내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녀석의 짧은 말에서 절체절명의 고독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난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내 위로 자체가, 연민 자체가 녀석이 살아 온 삶을 모독하는 것만 같았다.

난 녀석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무덤덤하게 그저 빙긋이 웃었다. 

이후 녀석과 더 자주 만났다. 일부러라도 가끔씩 녀석에게 안부 전화를 한다.

 

작년 연말, 고등학교 시절 서클 동문회가 있던 날이었다.

그 날따라 녀석은 아주 대취했다. 난 녀석이 왜 이토록 심하게 취했는지 안다.

사회 밑바닥에 떨어져 버린 남루한 자신의 모습.

성적 정체성으로 종교적 신념마저 무너져 버리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 우리 사회의 비주류로 살아야만 할지 모르는 신산스러운 삶.

 

난 녀석을 들쳐 업고 내 차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정신을 잃을 만큼 흠뻑 취해버린 녀석이 집으로 가는 내내 차 안에서 울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슬픔을 다 토해내듯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조선일보에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광고가 실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참 잔인하다. 왜 자신과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언론에서 그 뉴스를 보면서

이 땅에서 차별 받고 있는 동성애자 모두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