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우아한 독설

타블로와 한국사회의 비이성적 사고에 대한 짧은 생각

zamsi 2010. 10. 3. 03:02

상식이 통용될 수 없는 사회에서 이성은 감성을 이겨낼 수 없다. 그런 사회일수록 합리적인 사고는 늘 비이성적 사고에 무찔러져 버린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아직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다.

 

특정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는 불공정의 아이콘인 대통령이 '공정'을 주장한다. 한국의 정치와 행정부를 이끌어 가는 위정자들은 불법과 탈법을 당당하게 저지르면서도 피지배자인 국민 대중에게는 법치와 질서를 강요한다. 한국의 국민들은 불법에 대해 저항할 권리마저 박탈 당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는 차별이 다수의 이름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행된다. 지역감정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국민의 정치적 선택을 가로 막는다. 지역 감정은 그 뿌리가 아무리 견고하다 하더라도 결국은 배타적 차별이다. 한국 사회에서 주류라는 이름은 다수를 앞세워 소수를 압박하고 압제한다. 동성애자는 변태로 치부되고 양심적 병역 거부는 매국노로 지탄의 대상이 된다. 여성의 권리를 내세우면 꼴페미가 되고 다문화 사회와 이주노동자가 권리를 얘기하면 단박에 '니들 나라로 돌아가라'는 소름 돋는 악머구리를 듣게 된다. 한국은 비주류가 살아가기에 너무 힘든 곳이다.

 

'타블로' 라는 가수에게 자행되는 폭력을 보면서 다수를 앞세운 저질스러운 한국 사회의 차별에 치가 떨릴 지경이다. '타블로 사건' 문제의 본질은 개인에 대한 불특정 다수의 횡포이다. 그 어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도 인정되지 않는다. 현상을 파악하는 잣대는 철저하게 다수의 논리에만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형식적 논리도 다수가 만들어 놓은 구조를 벗어날 경우 승인되지 못한다. 때문에 '타진요'와 '상진세'라는 사람들에겐 타블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모든 증거 따위는 이미 그 효력을 얻을 수 없다.

 

과연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판단 장애의 불구자로 만들어 버렸을까? '타진요', '상진세'를 비판하기 이전에 이러한 비이성적인 구조는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한다. 

 

우리 사회를 찬찬히 들여다 보면 얼마나 많은 타진요와 상진세가 우리 사회 곳곳에 주류라는 이름으로 활개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한국은 이미 정치, 언론, 경제, 교육, 문화 곳곳에 다수라는 이름의 또 다른 타진요와 상진세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족벌수구언론은 이미 언론으로써 지켜야할 객관성과 중립성을 잃어버렸다. 단지 그들만의 생각으로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보만을 재단하고 조작하여 유통시키는 다수의 권력일 뿐이다. 

 

한국경제는 재벌이라는 족벌그룹이 이미 장악해버렸다. 이들은 막강한 자본으로 언론과 문화 그리고 정치까지 장악하고 있다. 이명박, 정몽준  그리고 이미 대부분의 정치권력은 자본에 잠식 당했다. 사학이라는 이름의 족벌들이 한국의 교육을 썩어 문드러지게 하고 있지만 정부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부패가 구조화 되어버렸다. 정치는 더 말할 나위도 없으며 예술, 문화까지 주류라는 이름의 다수가 독차지 하고 있어 이 땅에 언더그라운드가 살아 있다는 자체에 경외감이 들 정도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다수의 생각만이 정답으로 통용된다. 소수의 생각은 자연스럽지 못한 작위가 되고 다수는 항상 옳으며 소수는 늘 그렇게 배척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사회를 이토록 주류만이 판치는 세상으로 만들어버렸단 말인가? 그리고 과연 이러한 불합리하고 비이성적 사고의 뿌리는 어디에서 근원하는 것일까?

 

일제 식민지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뿌리 깊은 민족적 애국심이 국민 대중을 각성시켜왔다. 국민에게 민족과 애국은 생존을 위한 에토스였다. 국가가 곧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척도이며 중심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적 애국심은 국민 대중의 인식을 다수에 대한 지배적 구조로 변화시켜버렸다. 살고 죽는 문제 앞에서 개인의 권리와 존엄성은 늘 국가와 민족 앞에 희생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남과 북의 위정자들은 민족과 애국심을 자신들만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악용해 왔다. 한국 사회에서 '민족'과 '애국'은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통용되는 가장 뿌리 깊은 이데올로그이며 최소한의 레짐이다. 좌파가 '민족'을 앞세웠다면 우파는 '애국'이라는 말을 대신하지만 그 쓰임새는 별반 다르지 않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민족과 애국은 한국 국민의 뿌리 깊은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이러한 민족 동류의식과 애국심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증폭되고 표출되어 왔을까?

 

촛불집회의 시작이 되었던 효순 미선양 추모 집회는 불평등한 미국의 소파에 대항하는 민족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광화문을 붉게 물든인 2002년 '붉은악마'들의 함성 속에는 정열적인 애국심이 함께하고 있다. 이 땅의 국민을 뿌듯하게 만들다가 한 순간에 부끄럽게 만들어 버렸던 '황우석 국민기만극' 역시 한국인이 해냈다는 애국적 자긍심이 바탕이 되었다. 광화문을 물들인 '미쇠고기 광우병 사태'에 대한 무서운 저항은 한국 국민의  자존심을 건드린 결과이다.  

 

뿐만 아니다. 군복과 라이방을 표식처럼 착용하시고 가스통으로 무장한 '애국할배'들과 대한민국 어버이의 수준을 현격하게 떨어트리고 있는 '어버이연합회' 그리고 미국의 보수들도 사용하는데 있어 살짝  낯을 붉히며 계면쩍어힌다는 성조기를 팔이 떨어져라 펄럭이며 천상에 계신 '아버지'를 목이 찢어지게 외치시는 광신도연합회의 밑 바닥에도 '민족과 애국심' 은 보란 듯 헐떡이며 살아 숨 쉬고 있다.

 

'민족과 애국' 이라는 광신적 믿음이 타블로 사건의 본질이라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개인에 대한 다수의 횡포가 만들어 낸 폭력이라는 것 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러한 비뚤어진 비이성적인 사고와 인식의 저변에는 당신과 나, 우리의 내면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다수에 대한 막연한 옹호, 다수와 함께해야만 안도하는 저열하고 비겁한 동류의식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