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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msi bon INDIA 2. 불안한 이방인

zamsi 2010. 11. 23. 06:40

▲ 인도 여행 둘째 날

 

 

  ▲ 델리 시가지에 있는 개선문

 

   새벽녘 간신히 잠들었지만 이내 깨고 말았다. 옆 방의 텔레비전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요란한 인도 음악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기억나지도 않는 잡스러운 꿈을 꾼것 같다. 그리곤 이내 내가 인도에 와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아! 인도. 난 지금 인도에 있다.

 

아내는 아직 새근새근 잠에 취해 있었다. 모래라도 들어 간 것처럼 눈알이 가끌거린다. 손목 시계의 시침은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부스럭거림에 아내가 눈을 뜬다.  한 번 잠들면 웬만해선 눈도 끔쩍 않던 사람이 작은 소리에도 눈을 뜨다니. 긴장을 하긴 했나보다.

 

목이 말랐지만 생수병에 물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물은 홍콩에서 가져 온 것이다. 새벽에 도착하여 미처 물을 사지 못했다. 인도에서는 먹는 물에 주의해야 한다. 물을 함부로 먹다간 금방 배탈이 나고 만다. 배탈은 인도 여행에서 반드시 거쳐야할 필수 코스다. 거의 대부분의 여행자가 물갈이로 배앓이를 한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하냐가 차이라면 차이다.

 

하지만 한 번 배앓이가 지나가고 나면 마치 예방주사의 후 항체처럼 다시는 배탈에 걸리는 일이 없다. 물은 가능한 미네럴 워터를 사 먹는 것이 좋다. 인도 미네랄워터는 비싸지 않다. 다만 물을 살 때 포장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가짜 생수가 있기 때문이다. 비닐 커버가 벗겨져 있거나 조악한 상표는 피하는 것이 좋다.

 

내와  새벽의 괴 정체 터번의 사내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그가 누군지 무엇 때문에 우리 방의 문을 세차게 두드렸는지 결국 알 길이 없었다. 가이드는 9시에 오기로 했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간 밤의 후과론 인해 도통 방 밖으로 나가기가 두려웠다. 참 소심한 여행자다. 겨우 용기를 내어 일단 방 밖으로 나가기로 합의를 했다. 합의를 도출하는데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배낭에 짐을 챙겼 넣었다. 프론트에 짐을 맡기는데 커다란 배낭을 맨 동양 여자가 씩씩하게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 왔다. 일본 여행객이었다. 정말 그녀가 반가웠다. 그저 간단한 인사만 했는데도 마치 천군만마 동지를 얻은 기분이었다.

 

   ▲ 인도의 시장. 저게 과연 무얼까?

 

빠하르간지는 델리의 시장통이다. 우리의 이태원 시장을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드디어 인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다. 우리가 간 3월달은 인도로 치면 가을 즈음에 해당한다고 한다.

사람들의 입성이 남루하다. 커다란 눈망울로 모두 우리만 바라본다. 미소도 짓지 않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 본다. 모든 사람이 우리만 바라보니 시선을 둘 곳이 마땅치 않다. 아침이라 그런지 여행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내 곁에 바싹 붙었다. 우리는 그렇게 불안하게 빠하르간지 시장을 향해 나섰다. 인도의 형형색색 전통 의상들이 여행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천진한 아이들은 우리에게 손을 흔들기도 했다.  인도의 아침 역시 활기차다.

 

   ▲  인도의 시장. 옹기를 파는 여인의 미소가 참 건강하다.

 

가게에 들러 물을 사고 리어카에서 과일을 샀다. 아침을 대신하여 청포도를 먹었다. 새콤하고 달콤하다. 길 여기저기 소가 걸어 다닌다. 길 바닥은 소가 산 똥이 널부러져 있지만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아! 낙심스럽다. 왜 하필 인도로 여행을 왔을까. 후회스러울 지경이다. 내가 낙담하면 아내가 불안해 할까봐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낭패감이 떠나질 않았다.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들에 질려 얼마 걷지도 못하고 다시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 가이드를 기다렸다. 간사한 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그렇게 불안했던 게스트 하우스가 마치 내집처럼 편안해졌다.

 

 ▲ 인도의 시장. 과일을 파는 사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적의는 없다.

 

 

  ▲ 시장통 이발소. 어린이용 의자가 퍽 정겹다.

 

가이드는 약속한 9시를 넘겨 10시가 다 되어서 나타났다. 이름은 삐삔 이었지만 우리는 '포티'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제 갓 서른을 넘겼지만 40대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생김새가 그런 게 아니라 원숙한 노숙함이 엿보여 그런 별명이 붙었다. 참 속 깊은 청년이다. 삐삔에 대해서는 나중에...

 

처음 우리가 찾은 곳은 인도의 오래된 성 중 하나인 붉은 성 라길랴이다. 빠하르간지에서 붉은 성까지는 오토릭샤를 타고 가야 했다. 릭샤는 쉽게 설명하면 인력거와 비슷하다. 하지만 자전거를 탄 사람이 끈다. 바이시클 릭샤를 그냥 릭샤로 부른다. 거기에 오토바이를 달면 오토릭샤가 된다. 인도의 대표적 대중 교통수단이다. 단거리는 대게 바이시클 릭샤를 타고 원거리는 오토릭샤를 탄다. 물론 바이시클 릭샤가 훨씬 저렴하다. 문제는 가격이다. 인도는 무엇이든 흥정을 해야만 한다. 특히 외국인에겐 흥정을 하지 않는 거래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 릭샤를 타고 찍은 인도의 사람들

 

인도식 흥정은 터무니 없는 가격을 부르고 손님은 가격을 깎는 게 대부분이다. 인도 사람들은 하나 같이 처음에는 터무니 없는 가격을 말한다. 흥정을 하고 값을 깎는 것도 여행의 재미이다. 그러나 여행이 길어질수록 짜증스럽다. 똑같이 되풀이 되는 과정이 번거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도의 상인들은 여행 초짜를 귀신 같이 알아서 자칫하면 터무니 없는 바가지를 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간단한 힌디어 한 두 마디를 배워두면 좋다. 여행객에게 힌디어가 한 두마디 나오는 순간 환한 미소와 함께 '음 초짜는 아니군'이라는 통빡이 눈에 보인다.

 

"키 떠 나헤"  얼마예요? 라는 말이다. " 보뜨 멩가 헤"  너무 비싸요. 라는 말이다. 여행 일주일만 지나면 '멩가 멩가' 을 입에 달고 살게 된다. '비싸, 비싸' 그러면 알아서 갂아 준다. 흥정이 끝나면 '단네와" 감사합니다. 라고 말해 주면 함빡 웃음을 짓는 인도인을 보게 된다.

 

인도의 루피는 원화와 30대 1 정도의 환율 차이를 보여준다. 재밌는 사실은 우리돈으로 따지면 채 500원도 안 되는 금액을 여행 중에는 거의 목숨을 걸고  흥정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500원은 한끼 식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가난한 여행자에게는 큰 돈이다. 

 

인도에서는 흥정을 하고 있으면 구경꾼이 몰려든다. 그냥 구경만 하는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아예 훈수를 한다. 파는 사람이 영어가 좀 모자라다 싶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대신해서 흥정을 해주는 일은 흔한 일이다. 모두들 왁자하게 웃으며 흥정을 한다. 그러다보면 인도인 열명을 상대로 흥정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인도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아주 크게 웃는다. 그 너털웃음이 참 정겹다.

 

더 재미있는 일은 인도의 정말 따뜻할 정도로 훈훈한 상거래 질서다. 그들의 상도의는 황당할 정도로 대범하다.  예를 들어 릭샤꾼은 80루피를 내라고 하고 난 50루피만 받아라 실랑이를 하고 있으면 지나가던 다른 릭샤꾼이 50루피에 해주겠다고 낼름 손님을 가로채어 버린다. 하지만 그런 일로 싸우는 일은 없다. 한국 같으면 주먹다짐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인데 말이다.

 

 ▲ 인도의 도심 대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 숫소는 주인이 없다고 한다. 암소는 우유를 얻기 위해 주인이 있다고 한다. 소가 도로의 한 복판에서 차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다.

 

릭샤를 탈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릭샤꾼은 절대, 결코 어떤 일이 있어도 거스름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일부러 손님에게 보여 줄 빈 지갑을 가지고 다니며 거스름이 없다고 뻣댄다. 그러니 미리미리 잔돈을 준비하지 않으면 거스름을 받을 수 없다. 만약 잔돈이 없다면 흥정할 때 미리 잔돈을 보자고 요구해야 한다. 또한 몇 명이 타는지도 확실하게 다짐을 받아야 한다. 목적지에 와서는 흥정한 가격이 1인 기준이라고 우기는 릭샤꾼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인도에서 오토릭샤를 타고 붉은 성 랴낄랴로 향했다. 우리는 오토릭샤에 앉자 마자 탄복하고 말았다. 릭샤꾼의 운전 솜씨가 거의 신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인도는 차선이 없다. 있어도 없다. 신호등은 구경하기도 어렵지만 있다고 해도 무용지물에 가깝다. 차도는 차량과 릭샤, 오토릭샤 수레, 소떼로 바글바글 거린다. 그 험하고 좁은 길을 오토릭샤는 신묘한 솜씨로 헤집고 다닌다. 그제서야 어젯밤 탔던 차량의 사이드 미러가 깨어진 이유를 알았다. 사이드 미러가 배겨날 수 없을 터였다. 

 

 ▲ 붉은설 라낄라 앞에서. 아내가 포즈를 잡고 있다.

 

붉은 성 라낄랴에 도착했다. 찬드라굽타 왕조 시대의 성이라고 한다. 붉은 성은 퇴락하여 낡은 벽돌 색이 되어 버렸다. 황량하다.  문뜩 황성옛터라는 오래된 노래가 생각났다. 하지만 그 크기는 여행객을 압도할 만큼 크고 웅장했다. 정원은 오래되고 낡았지만 호화로운 자취마저 숨길 수 없었다. 인도 건축은 놀랄 만큼 정교하며 섬세하다. 이 처럼 거대하고 섬세한 건축을 위해 희생되었을 인도의 인민을 잠시 생각했다. 어느 시절이나 인민의 눈물은 위대하다.

 

  ▲ 라낄라. 얼핏 봐도 정교한 자태가 살아 있다. 우리로 치면 조선초기 쯤 건물이다.

 

  ▲ 라낄라 성. 아직 여행 초기라 볼살이 제법 통통하다.

 

인도식 식당을 찾았다. 향신료 냄새와 코코넛 오일 냄새가 진동한다. 커리와 탈리 그리고 난을 시켰다. 난은 반죽한 밀가루 전병을 화덕에 구운 인도의 전통 주식이다. 고소하고 담백하여 비위가 약한 여행자에게 안성마춤인 음식이다. 난에 야채를 넣어서 번철에 구우면 롤링난이 된다. 길거리에서 많이 파는 음식이다. 간이 강하지만 충분히 배가 부를 만큼 크다.

 

아내는 인도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는다. 남자 보다 여자들이 훨씬 더 글로벌하다. 여행중에 만난 한국 여성 두명은 인도 여행중 오히려 살이 찌고 있다고 했다. 아! 촌스러운 입맛이여.  배가 너무 고팠지만 쉽게 먹지 못한다. 결국 난만 커리에 찍어서 먹었다.

 

인도 여행에서 빼 놓을 수 없이 맛 있는 음식이 하나 있다. 라씨라는 인도식 요거트다. 발효된 우유에 시원한 물과 설탕을 탄 혼합 음료이다. 바나나 라씨도 있으며 파인애플 라씨도 있다. 길거리에서 흔하게 파는 음식 중 하나인데 기가 막히게 맛있다. 단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설탕 대신 소금을 넣어달라고 얘기하면 된다. 그리고 짜이라는 차가 있는데 정말 지독하게 달고 뜨거운 차다. 한 모금만 마셔도 그 단맛이 입에서 한동안 가시질 않는다.  

 

인도는 요리의 천국 답게 수 많은 요리가 있지만 강한 향신료 때문에 여행자가 즐기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호텔이나 큰 레스토랑이 아니면 음식을 먹기가 참 팍팍하다. 이유는 청결 때문이다. 한 눈에 봐도 너무 불결하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스푼이 더럽다고 말하면 웨이터는 불결한 자신의 앞치마로 쓱 닦아서 줄 정도다. 현지인들이 먹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너무 많은 파리떼로 인해 손을 훼훼 저으면서 밥을 먹어야만 한다. 과장이 아니라 어느 한 현지 식당에는 식탁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많은 파리가 앉아 있었다.

 

  ▲ 도심가의 한 낡은 건물. 낡았지만 웬지 멋져 보여 한 컷.

 

점심을 먹고 시크교 사원과 인도 템플을 찾았다. 시크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적당히 뒤섞인 인도의 자생 종교다. 그리고 시크교도는 꼭 터번을 쓴다.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힌두교인과 서로 친하지 못했다.  이유는 시크교가 힌두교 보다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더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힌두교는 유일신이 아닌 다신교이다. 신만 무려 1억 명에 가깝다고 하니 세상에 신이 아닌 것이 없을 지경이다. 그러다보니 세상 그 어떤 종교보다 넓고 큰 포용력과 평화를 지향한다. 그 많은 신이 살아가려면 평화롭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힌두교의 포용력은 세계적 종교 불교를 탄생시키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슬람교 역시 인도에서 번창했으며 힌두교와 공존했지만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간교한 식민통치로 인해 분쟁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독립되었으며 지금은 북한과 일본 보다 훨씬 더 으르렁대는 적대국으로 변해버렸다. 인도 사람들은 파키스탄을 인도의 화장실이라고 부른다.

 

시크교 사원은 금욕적 교리가 말해주듯 검박했다. 화려한 치장도 없을 뿐더러 호화스러운 회랑도 없다. 그들의 기도는 경견했으며 신실했다. 시크교 사원은 신발을 신고 입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진 촬영도 금지 되어 있었다. 인도 템플은 힌두교 사원이었다. 고대 힌디사원이 아니라 2005년에 완공된 현대식 사원이었다. 하지만 그 규모와 섬세한 건축물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정교하고 호사스러웠다. 하지만 이곳 역시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가이드와는 저녁에 만나기로 하고 아내와 둘이서 델리 시내 구경에 나섰다. 어딜가나 인도의 호객꾼은 거의 사람을 질릴 정도로 밀착 마크를 하고 나선다. 누구나 친절하게 말을 걸지만 함부로 대꾸해선 낭패를 보기 일쑤다. 만약 대꾸를 했다가는 한참 실랑이를 벌여야 겨우 떨쳐낼 수 있다. 그저 말을 걸어도 모른 척 지나가는 게 상수다. 거기다 여행자만 노리는 소매치기가 있어 작은 가방은 꼭 앞으로 매고 다녀야 한다. 인도에서 대도시는 퍽 불편하며 불안하다. 앞을 가로막는 걸인, 여행객을 노려보는 현지인, 시선만 마주치면 득달 같이 달려드는 호객꾼.

 

하지만 모든 인도인이 그런 것은 아니다. 조금만 도심을 벗어나면 순박하고 해맑은 인도의 미소와 만날 수 있다. 아침이면 곱게 합장하고 눈만 마주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온화한 미소로 '나마스떼'라고 인사해 준다. 나마스떼는 '당신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라는 말이다. 아이들은 부끄러움이 많으며 소녀들은 수줍어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한다. 노인들은 선량한 웃음으로 인사하고 길이라도 물으면 아주 상세하고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문제는 어느 곳이나 그런 것처럼 도시와 관광지이다. 그들은 관광객 때문에 먹고 살아야하니 어쩔 수 없이 그러려니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 빠하르간지의 인도 카페. 방석을 붙이고 아내는 정말 코까지 골며 잤다.

 

저녁이 다 되어서 다시 빠하르간지로 돌아왔다. 저녁은 외국인 식당에서 먹었다. 아내는 역시 인도 전통 음식을 주문한다. 나는 햄버그와 하이네켄을 시켰다. 하루종일 걸었더니 맥주 한 병에도 금새 취기가 돌았다. 빠하르간지에서는 꽤나 유명한 외국인 식당이었다. 많은 배낭여행객들이 북적거렸다. 빠하르간지의 밤거리를 거닐다 인도식 카페에 들어갔다. 소파 대신 방석이 깔려 있었다. 지친 아내가 방석에 눕더니 바로 잠들어 버렸다.  우리는 그날 밤 뿌쉬꺼르로 가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야간기차였다. 인도의 기차는 또 어떤 것,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 기차를 기다리는 인도 사람들. 기차역 대합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길에 이불을 깔고 자고있다.

 

저녁 8시 가이드가 왔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델리 기차역으로 가는 오토릭샤에 올랐다. 우리가 타야할 기차는 9시 30분 이었지만 기차는 늘 그랬던 것처럼 제 시간에 오지 않았다. 인도에서 기차 연착은  일상적인 일이다. 인도 여행 중 꽤 많이 기차를 탔지만 제 시간에 기차를 타 본 적이 없다. 한 시간 연착은 고마운 일이며 서너시간은 양호한 편에 속한다. 하지만 이에 항의하거나 성내는 인도인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늘 여유롭다. 여행자의 눈에는 남루하고 힘들어 보이지만 인디언은 결코 여유를 잃지 않는다. 현세의 어려움을 내세의 복으로 여기는 사람들. 그들에게 가난은 결코 불편도 아니며 그저 함께 살아가야하는 삶의 동반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 인도의 기차 플랫포옴

 

우리는 퇴색한 파스텔화 같이 희미한 인도의 밤에 걸터 앉아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인도의 둘째 날은 가뭇없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