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잠시본곳

무작정 떠난 겨울 여행

zamsi 2011. 2. 27. 04:43

아무런 작심도 없이 칫솔 하나만 챙겨서 훌쩍 여행을 떠났다.

양양에서 칩거 중인 친구놈에게 다녀 올 요량이었다.

친구는 작년 부터 하던 사업을 작파하고 양양에 머무르고 있었다.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아는 사람도 없고 그저 산과 하늘만 보고 살고 있다.

시골 생활이 따분한지 연락만 하면 놀러 오라 성화다.

 

친구에게 들르기 전에 이곳 저곳 그냥 정처 없이 좀 떠돌기로 했다.

 

철원을 지나다 옛 노동사를 발견했다.

일부러 찾아 간 것이 아니고  지나다 정말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분단의 아픔처럼 뼈대만 남아 있다.

      

 

 

 뒷 모습이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쩍쩍 갈라진 벽 사이로 세월의 아픔과 흔적이 고스란이 묻어 있다.

 

 

한참을 달려 속초에 왔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달리 갈 곳을 정하지 않아서 아쉬운 것도 없다.

차로 속초 시내를 둘러보았다. 

비철이라 그런지 관광지 치고는 사람이 너무 없다.

 

그래도 대물포항은 여전히 호객에 여념이 없다.

브레이크를 밟을 정도로 차로 뛰어드는 호객 행위에 입맛이 삭 가셨다.

숙소를 정하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나왔지만 이미 식당들은 거의 문을 닫아버렸다.

아홉시도 안됐는데...

결국 속초까지 가서 좋아하지도 않는 순대국밥을 먹고 말았다.

다행스럽게 맛은 좋았다.

씻기가 무섭게 골아 떨어졌다. 피곤했나 보다.

 

여행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9시가 넘었다. 모텔 커튼을 여니 멀리 바다가 보인다.

어디를 갈까?  어제 순대국을 먹으며 식당 벽에 붙어 있던 속초 광광지도가 떠올랐다.

 

속초해수욕장, 영랑호, 설악산...

그래 일단 움직이고 보자.

 

 

 

영랑호다. 생각보다 굉장히 크다. 호수공원의 세 배는 족히 될 것 같다.

아직 얼음이 채 녹지 않았다.

 

 

 

속초 해수욕장 한 편에 있는 방파제 끝에 정말 잘 안 어울리는 청동 나무가 하나 서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엄마들이 사진 찍기에 바쁘다.

괜히 서서 얼쩡거리다 결국 찍사가 되어주고 말았다.

 

속초는 냉면이 제법 유명하다.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북쪽을 찾다보니 속초에 많이 눌러 살게되었단다.

함경도 사람들이 많은데 그래서 함경도 아바이 순대와 함흥 냉면이 유명하다.

 

단천냉면이라고 가자미 냉면으로 유명한 집을 일부러 찾았다.

다행히 속초 해수욕장 주변에 있었다.

속초냉면은 물냉면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비빔냉면도 아닌 모양을 가지고 있다.

비빔냉면에 냉육수가 주전자에 따로 나온다.

많이 부으면 물냉면이되고 조금 부으면 비빔냉면이다.

난 물냉면을 좋아하는지라 육수를 좀 많이 부었다.

주인이 보더니 육수가 많다며 직접 조리를 해준다.

겨자와 식초를 타는 것 까지는 참을 수 있었지만 설탕을 한 수푼이나 넣는다.

 

 

 

먹다 생각이 나 찰칵

 

역시 함흥냉면은 내 입맛에 아니다.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의 차이는 크게 면발에서 난다.

평양냉면은 메밀을 주원료로 하여 면이 도톰하고 씹으면 구수한 맛이 난다.

이에 비해 함흥냉면은 고구마 전분을 많이 써 면이 가늘고 질기다.

육수도 평양냉면은 닝닝한 맛이지만 함흥냉면은 달고 매콤 새콤하다.

그래도 이름 난 집이라 국물이 개운하고 시원했다.

달고 새콤 매콤하여 여자들이 좋아하겠다.  

 

점심 후 설악산으로 향했다.

산을 오를 엄두는 못 내고 그저 케이블카로 설산의 운치를 즐기기로 했다.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 줄을 서는 수고도 없이 단번에 케이블카에 올랐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설악산

 

 

 

권금성. 케이블카에서 내려 10분 쯤 걸어 올라가면 나온다.

 

 

 

 케이블카에서 내려가면서 본 설악산. 멀리 속초 바다가 보인다.

 

역시 산은 좋다.

산을 내려와 가까운 온천으로 향했다.

척산온촌. 케이블카 입장료를 보여주면 천원을 깎아준다는 광고판을 보고 무작정 그곳으로 갔다.

역시 한적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그동안의 피로가 가시는 것만 같다.

온천을 끝내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양양으로 넘어 오란다.

 

친구는 양양에 아예 눌러 앉을 생각이었다.

새롭게 집을 짓고 있었다. 산 등성이에 개울가가 보이는 그야말로 별장 같은 집을 짓고 있었다.

사정을 알고보니 아들이 자폐증세가 있다고 한다.

그런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접고 시골로 내려왔단다.

 

우선 차나 한 잔 하자며 친구가 데리고 간 곳이 낙산사였다.

대부분이 다방이라 딱히 커피를 마실 곳이 없단다.

 

 

 

해 저무는 의상대.

 

 

 

암자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친구 성화에 단골 막걸리집으로 갔다.

동그란 테이블이 딱 세개 밖에 없다.

주인 여자는 '주모'로 불리고 있는데 건축학 박사라고 했다.

손님이 와도 반갑고 살가운 모양이 없다.

안주도 그저 주는 대로 먹어야만 한단다.

곧 있으니 수염을 기른 중 늙은이 한 명이 들어왔다.

친구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이 양반 다큐 '차마고도'를 만든 감독인데 양양에 숨어 산다고 한다.

첫 대면인데도 반갑게 내 손을 잡더니 선물이라며 한 장 CD를 건넸다.

CD에는 '봄날은 간다'라고 쓰여 있었다.

 

주인도 손님들도 모두 숨어 사는 사람들이다.

막걸리 주전자가 잘도 빈다. 난 딱 한 잔만 받았을 뿐인데

두 주전자가 훌떡 비어버린다.

 

술에 취한 친구가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친구가 외로워 보였다.

외로움은 사람을 시인으로 만드나 보다. 

자정이 지날 때 까지 두런두런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야말로 흙바람 벽에는 30촉 백열등이 그네를 타고 있었다.

 

셋째 날. 오색 약수터에서 친구와 늦은 아침을 먹었다.

황태 북어국에 고로쇠 수액 한 잔.

술도 안 먹은 내 장이 다 해장 되는 것만 같다.

시원하고 감칠맛 나는 동치미며 산나물 맛이 그만이다.

먹는데 열중하느라 사진을 못 찍었다.

 

친구와 헤어지고 정동진으로 향했다.

정동진으로 가다가 어제 선물 받은 CD가 궁금해 음악을 틀었다.

음.... 제목 그대로 '봄날은 간다'였다.

그런데 총 10 곡 모두가 '봄날은 간다'였다.

조용필, 이동원, 장사익, 심수봉, 나훈아, 한영애 .....

열 명의 가수가 자신 나름의 창법으로 알뜰한 그 맹서로 봄날을 보내고 있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함께 우는.... "

 

외로운 사람들은 가슴 속에 저 마다의 봄날을 간직하고 산다.

그렇게 쓸쓸하고 스산하게 정동진에 왔다.

 

 

정동진역은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개가 짙게 깔려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조용한 찻집에 들어왔다.

창 밖에는 안개 낀 바다가 보이고...

재즈가 흐른다.

펜을 들었다.

진한 에소프레소 한 모금.

겨울이 가고 곧 봄이 올 게다.

 

내친 김에 추암으로 향했다.  

정동진에서 30분 거리.

예전 어릴적 겨울, 혼자 무전 여행 중 추암을 들른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는 정말 너무 춥고 배고프고 외로워서 여행이고 뭐고 눈물만 났다. 

20년이 넘게 지난 추암은 옛 모습을 찿기 힘들 정도 였다.

 

 

 

 추암 들어가는 입구이다. 연리지라는 다리를 건너면 작은 찻집이 있다.

 뒤로 촛대바위로 향하는 길이 있다.

 

 

 

 추암의 해변이다. 아직 눈이 덮여 있다.  이 겨울에도 바다를 찾은 연인이 있다.

   

 

 

 추암 촛대 바위다. 촛대바위를 향해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한다.

 

 

 

 추암 해변가 너머 산길에 위와 같은 길을 만들어 놓았다.  

 꽤 길고 바다가 한 눈에 보여 퍽 운치 있었다.  

 

 

 해안가 길에서 본 추암이다.

 

 

 추암을 벋어나는 개울가에 오리가 한갓지게 놀고 있었다.

 오리를 찍는 나그네의 그림자가 외롭다. 이제 돌아가야지.

 

막 추암을 벗어나려는데

두 명의 젊은 아이들이 낙담해 서 있다.

버스가 없단다. 두 시간을 넘게 걸어야만 하니 걱정스러울 밖에.

동해까지 태워주웠다. 나도 저 만할 때 무전 여행을 했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세월이 덧 없다. 

 

돌아오는 길.

아직 봄도 오지 않았는데

'봄날은 간다'를 서른 번은 더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