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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가족 '찌질한 현실에 대한 헌사'

zamsi 2013. 7. 14. 10:10

 

 

 

 

 

빈 파우더 패밀리 (bean - poeder - family )

콩가루 집안, 영화를 보는 내내 떠 오른 단어였다.

 

송해성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보지는 않았다. 

아주 오래 전 '파이란'이라는 영화를 제법 인상 깊게 본 기억이 남아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파이란은 송해성 감독의 입봉작이다.

최민식이 막 영화판에 뜨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는데 구질구질한 연기가 참 좋았다.

이후 최민식은 한국영화에서 밑바닥 삶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어버렸다. 

 

고령화가족의 원작은 천명관의 소설이다.

몇 해 전, 친구 놈 강권으로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읽었다. 

이야기가 독특하고 괴이하며 퍽 흥미롭다.

그로테스크한 사건이 씨줄과 날줄 처럼 복잡하게 엮어지면서도

탄탄한 서사의 힘이 끝까지 이야기의 중심을 붙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좋았지만 남에게 선뜻 권하고 싶지는 않는 소설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천명관 특유의 힘이 보이지 않는다.

원작을 읽어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천명관이 가지고 있는 괴기하고 음울하고 암담하기까지한

서사의 힘이 화면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순화되어버린 것 같다.   

 

영화는 썩 좋지도 그렇다고 아주 나쁘지도 않았다.

영화를 나쁘게 만들지 않은 가장 큰 힘은 배우들이다.

윤여정, 윤제문, 박해일, 공효진 게다가 어린 지진희까지 참 연기를 잘 한다.

그런데 그저 잘 하는 연기일 뿐 감동이 없다.

 

윤제문은 '비열한 거리'에서 보여주던 섬뜩한 몰입이 없다.

박해일은 오버한다. 힘이 빠져야 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보여주던 담박한 눈빛이 사라지고 있다.

공효진의 연기는 유쾌하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엄마의 모습이 없다.

캐릭터를 위한 설정일수도 있지만 덧붙이자면 모성은 본능이다. 

빵꾸똥꾸 지진희의 연기가 좋다. 거짓이 없다. 느낀대로 정직하게 연기한다.

몰입이 좋다는 증거다. 저대로만 크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모두의 연기가 심심했지만  윤여정의 연기는 '잘 한다'를  넘어  훌륭했다.

자식들이 싸우는 식당에서 혼자 소주를 홀짝이는 장면은  

영화 '빠삐용' 엔딩에서 절벽에서 무심하게 바다를 바라를 바라보던

더스틴 호프만이 연상될 정도로 절창의 연기였다.  

윤여정은 나이를 먹을 수록 연기가 깊어 진다.

이전 윤여정의 연기를 보면 연기를 계산하는 모습이 보일 정도로 분석적이었다.

이번 영화에서 보여주는 윤여정의 연기는 '느낌'이 보일 정도로 편하다.

어쩌면  윤여정이라는 배우에게는

계산과 분석마저 느낌으로 표현하는 달인의 내공이 쌓였을 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내용은 찌질한 군상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가족 모두는 각자의 아픔을 안고 산다. 그런데 그 모습이 참 구차스럽다.

그럼에도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삶이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겪어나가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극에 동화되는 스스로가 짜증스럽다. 

현실의 비루함을 영화에서까지 확인하는 일은 곤욕이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노골적으로 신파를 드러낸다.  

나는  잘 짜여진 신파를 좋아한다. 신파가 주는 코끝 시린 애련함이 좋다. 

하지만 강요된 신파는 오히려 관객의 감정 이입을 방해한다.

등장인물의 삶에 의미를 덧 입히는 감독의 의도가 거슬린다.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이유는 있다. 

그렇다고  굳이 모든 삶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감독은 가족이라는 애정과 끈끈함으로 영화를 결말지으려 한다.  

가족애에 신파를 버무려 희망을 포장한다. 

신산스러운 현실과 고달픈 일상에 대한 감독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계도적인 또는 의도된 배려가 제법 불편했다.

작위는 헤집고 들어갈 공감을 차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린 희망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지만  절망이라는 무게가 개인에게 있어 삶의 전부는 아니다.

절망이라는 중압감은 타인의 시각으로 재단하거나 계량할 수 없다.

절망에 너무  가중치를 부여하면 억지 희망이라는 작위가 드러난다. 영화가 그랬다.

 

삶은 그저 흘러간다. 의미 없는 것도 의미다.

내 삶의 불행과 절망은 오직 나만의 것이다.

우린 너무  쉽게 타인의 불행과 절망에 관계하고 관여하려 든다. 

나는  배려라는, 친절이라는,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남발되는

오지랖  넓은 간섭이 불편하다.

 

미안하지만 그냥 내버려두시라.

절망도 권리다.

 

기실 오늘 글을 쓰고 싶었던 더 큰 이유는

영화가 아닌 한 곡의 노래 때문이다.

영화 고령화가족의 엔딩 곡 '초우'를  듣다 정말 깜짝 놀랐다.

창법이 너무 독특했기 때문이다.

엔딩 곡 하나 때문에 영화가 좋아져버리는 기묘한 일은 처음이다.

 

검색해보니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이라는 인디밴드의 노래다.

실로 오랜만에 노래에서 감동을 받는다.

내 무식함의 소치겠지만 한국에 이토록 독특한 밴드가 있었다니...

 

중학교 시절 들었던 비틀즈의 '렛잇 비'

감수성 예민한 청년시절 눈물 짓게 만들던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이후

처음으로 상념에 젖어들 정도로 노래들이 좋다.

발랄하고 자유롭다. 

삶에 시니컬하면서도 분노 보다는 아픔이 져며있다.  

 

특히 '불행히도 삶은 계속 된다.' 라는 노래는 가히 압권이다.

내용이 제법 폭력적이라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정직한 표현 속에서 묘한 전복의 쾌감을 느낀다.

지금까지 이처럼 직설적으로 억눌린 감정을 토해내듯

배설하는 노래는 처음 들어봤다.

그리고 노래의 정조와 음률이 참 서러울 정도로 슬프다. 

 

현실의 찌질함과 불행의 절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헌사인 것만 같다.

 

"불행히도 삶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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