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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총성 '리피피'

zamsi 2014. 9. 4. 02:39

오랜만에 편도선염이 도졌다. 편도선염이라는 병은 사람을 참 성가스럽고 힘들게 만든다. 딱히 특정 부위가 크게 아프지는 않지만 목의 염증으로 열이 오른다. 고열로 앓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참 괴롭고 견디기 쉽지 않다. 시쳇말로 몸져 누운 상태로 오한과 고열 속에 땀만 삐질댄다.

 

 

간 밤에 고열로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아침이 되자마자 병원으로 직행했다. 편도에 염증이 심하게 잡혀 의사 말을 그대로를 옮기면 농이 뚝뚝 떨어진단다. 주사 한 방 맞고 조신하게 집으로 돌아와 앓는 일 밖에 없다.


몸이 불편하니 정신을 수습하기도 귀찮아 책도 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누웠자니 허리도 아프고 지루하기만하다. 이럴 때는 깔깔댈 수 있는 TV 코미디 프로가 제격이다. 예능 프로 몇 편을 시시덕기리며 보다가 이내 지쳤다. 별로 안 웃긴다. 웃지 못하는 내가 유행에 뒤처진 것 같아 씁쓸하다. 요즘 케이블은 무료 영화도 골라 볼 수 있다. 꽤 많은 편수들 중에서 볼만한 영화를 골라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몇 번을 들추다가 영화 한 편에 눈이 멈췄다. 





'리피리(Rififi)' 프랑스 범죄 영화의 걸작 고전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고전'이라는 말에 김이 좀 샌다. 오래된 영화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지 오래다. 예전에 일부러 고전 명작을 찾아 볼 때가 있었다. 취미도 있었지만 어린 시절 지적 허영이 들썩인  것도 사실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지적 허영심이 잦아 들어서 인지 언제부턴가 고전영화가 썩 내키지 않는다. 내러티브도 진부하고 늘어지는 구성이 지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전 영화에 감동이나 미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눈이 돌아갈 만큼 정신 없는자본주의 속도에서 고전의 느림이 주는 치유의 힘은 크다. 문제는 스피드에 중독된 거친 심상이 밋밋한 고전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아무튼 몸도 안 좋고 좀 여유롭게 영화를 보기 위해 리피피를 선택했다. 

근데 리피피가 도대체 무슨 말이야?


영화의 시그널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고전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엔딩 크레딧이 아닌 시그널 그레딧을 선호한다. 요즘 영화의 마지막 그 길고 지루한 크레딧으로 첫장면을 시작하는 거다. 관객에 대한 불친절로 보일 수도 있지만 따지고보면 예술에 대한 긍지이며 예술인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이다. 영화가 한 편 만들어지기까지 백명이 넘는 스텝이 필요하다. 그런데 영화를 만드는 공동창작자들에 대한 예의와 배려는 갈수록 부박하다. 특히 한국영화는 정도가 심해 욕지기가 치밀 정도다.  보도에 의하면 영화 스텝의 평균 급여가 100만원을 넘지 못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예술도 돈이다. 급여는 일하는 사람의 인격이다. 한국영화에서 공동창작자들은 금전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무시를 당하고 있는 셈이다. 음 이야기가 딴 데로 세고 있다. 각설하고...


 

아! 근데 흑백영화다. 조금 낭패스러웠다. 흑백영화라고 한다면 60년대 훨씬 이전의 영화다. 나중에 검색해 봤더니 1955년 영화였다. 아무리 걸작 고전이라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영화다. 봐야 돼 말아야 돼? 살풋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오늘 '심봤다'  정말 숨은 걸작을 만나고 만 거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영화라서 배우를 알 턱이 없다. 그것도 허리우드 배우가 아닌 프랑스 배우를....

아랑드롱, 장 폴 벨몽도, 이들 보다 앞선 세대다. 영화가 좋으면 감독을 찾아보는 것이 습관이라 검색을 해봤더니 '줄스 다신'이라는 감독이다. 원래 허리우드에서 잔 뼈가 굵은 미국 감독이었지만 매카시 선풍으로 빨갱이 낙인이 찍혔다. 60년이 넘은 한국에서는 아직도 빨갱이 낙인 찍기가 성행이다. 가슴이 아프다.


줄스 다신은 허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올라 유럽으로 건너와 프랑스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편협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역시 의식있는 사람이 영화를 훨씬 더 품위 있게 만든다. 내 무식의 소치이겠지만 이 양반 알고보니 퍽 유명한 감독이다.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를 만든 사람이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영화 '페트라'를 만든 거장이었다. 페트라 영화는 못 봤어도 그 주제가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큼 유명하다. 청소년시절 라디오 '이선영의 영화음악'에서 줄창 틀어대던 음악이다. 


 

사전 지식이 없던 관계로 언제라도 채널을 돌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영화보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도입부는 좀 실망스럽다. 인물을 소개하는 방식이 상투적이고 도식적이다. 감옥에서 5년만에 출옥한 왕년의 대도 토니는 도박판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고 있다. 게다가 병까지 들었는지 창백한 얼굴에 잔 기침을 멈추지 않는다. 


 

이쯤되면 빤하다. 저 왕년의 도둑은 다시 범죄의 소용돌이로 빠질 것이다. 그리고 은퇴한 대도를 범죄의 세계로 다시 끌어들이는 것은 지난 시절의 동료일테다. 로맨스를 이어가려면 여자가 빠질 수 없다.

옛 애인 그것도 뻑이 갈 정도의 미모의 여인이 지금은 다른 악당의 여자가 되어 있을 게다. 물론 그 악당은 주인공과 대립관계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빙고, 나의 모든 예측은 거의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주인공이 첫 번째 범죄공모 제의를 물리칠 것이라는 것도 알아 맞혔다. 모든 드라마에서 통용되는 '삼 세번'의 공식이 있다. 두 번 실패하고 세 번째 성공한다. 두 번 성공하면 마지막 세번 째 반드시 실패한다.


 

영화를 보기가 점점 지루해진다. 결론도 결말도 뻔하게 예측된다. 고전 영화가 추구하는 모럴에 비추어 보건대 범죄가 성공하는 예는 거의 없다. 성공해도 결말은 비극이다. 모두 죽거나 모두 잡혀간다. 이 또한 공식이다. 


 

막 채널을 돌리려는데 눈을 끄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카바레에서 지금으로 치면 클럽이 되겠는데 한 무희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 노래의 제목이 바로 '리피피'다. 리피피는 프랑스 뒷골목 암흑가의 은어로 '거친 남자들의 말싸움'이라는 뜻이다.


 

말싸움은 싸움이 일어나기 전의 전초전이자 싸움의 시작이다. 남자들 세계에서는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싸움의 시작은 말이 먼저다. 대게 보면 주먹다짐은 기싸움이 우선이다. 상대의 눈에 겁이 들어가면 그 싸움은 해보나마나다. 동물이 싸우기전에 으르렁거리듯 사내들은 말로 싸운다.  비교적 상대의 전의를 죽이기 위해 눈에 힘을 빡 주고 살벌한 욕지기를 퍼붓는다. 어린 시절 내가 자란 부산은 말싸움이 비교적 간결했다.


 

"됐나?"

"됐다!"


 

서울로 전학을 왔더니 말이 길어졌다. 그런데 말 뽄새가 하도 귀엽고 우스워 겁을 먹기는커녕 우스웠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에 인이 박힌 내게 서울내기들의 얄팍한 욕 따위들은 농담 따먹기 수준에 불과했다.


 

" 너 죽고 싶어? 요런 씨벨.... "


 

요 따위의 귀여운 멘트를 날리는 상대를 향해 코웃음을 치며 선방을 날렸다. 싸움은 비겁의 유무를 떠나 선방이 가장 큰 승리의 요건이다.  힘 없고 외로운 부산촌놈은 일단 싸움에 이겨 존재를 부각시키는 게 중요했다. 그게 학교 생활하기 편하니까.... 


 

제목과는 다르게 영화 리피피는 말싸움이 없다.  거친 사내들은 말보다 행동으로 말한다. 지루한 도입부가 지나고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영화에 눈을 뗄 수가 없다. 방자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자세로 영화를 보니 화면의 배치가 놀랍다. 모든 장면이 정교하게 계산된 구도다. 카바레 여가수가 세션들과 무대 연습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절제되고 유려한 카메라 워크가 현대 영화에서도 흔치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  


 

배우들의 연기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 독특한 캐릭터들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자신의 개성을 간직한 채 넘치게 연기하지 않는다. 감독이 그만큼 작업을 철저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증거다. 


 

범죄가 시작되면서 대사가 줄어든다.  시퀀스가 빨라지고 음악과 교차 편집으로 극을 이끌어 간다. 범죄를 준비하는 과정은 현대 어떤 범죄 영화보다 치밀하고 흥미롭다. 이 영화가 현대 범죄물의 교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될 정도다.


 

압권은 점 찍어 둔 보석상을 터는 장면이다. 놀라운 사실은 거의 30분에 가까운 장면 동안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없다는 점이다. (검색해 보니 정확하게 28분 이었다.) 28분 동안 배우들의 거친 호흡 소리 밖에 없다. 보석상 안과 밖의 교차 편집은 히치콕을 능가할 정도로 공교하고 박진감이 넘친다. 정말이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긴장감을 유지한다. 


 

범죄 영화의 공통점은 범죄에 성공하지만 범죄 이후에 실패한다. 배분과정에서 동료들 간에 문제가 생기거나 아니면 새로운 악당의 개입으로. 그리고 관객이 속상하고 얄미울 정도로 사소한 실수가 빌미가 되어 파국이 시작된다. 


 

리피피 역시 예외 없이 공식을 답습한다. 아니 어쩌면 리피리가 이와 같은 공식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결말의 방식이 지금이야 구태할지 모르지만 세월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다. 엔딩 장면에서 토니의 자동차 주행신은 박진감 넘치면서도 서러울 정도로 슬프다.


파국을 처리하는 주인공 토니의 모습이 참 외로워 보인다. 냉혹하면서도 따뜻함이 묻어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차도남'정도가 되겠다. 연기가 크지 않지만 세밀하다.  잔기침을 할 때의 눈빛이 선량하고도 외롭다. 동료의 아이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만 배신한 동료를 면전에서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규율'이라는 말로 살해한다. 토니가 말한 '줗아 한다'와 '규율'은 둘 다 진심이다. 그래서 더 슬프다. 


 

토니는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한 부유하는 감독의 페르소나 일지도 모른다. 범죄에 가담하는 모든 동료들은 자신들만의 꿈을 가지고 있다. 아이를 위해서, 시집 못간 동생들을 위해서,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토니는 범죄에 대한 목적이 없다. 단지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라는 심드렁한 말이 전부다. 먹고 사는 일은 생존이다. 살기 위해서는 오로지 본능만 발동된다. 혹 영화를 보는 분을 위해서 여기서 마무리하겠다.


 

이 글을 시작할 때 시작한 딸꾹질이 글을 마치는 지금까지 계속된다. 딸꾹질은 난데 없이 찾아와 시나브로 사라진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사람의 행동에 대한 선택과 의지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과도하게 '자아'를 맹신한 나머지 개인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자신의 관점으로만 규정한다고 한다. 하지만 기실 사람의 행동은 의도되지 않은 순간의 선택이 지배한다고 책은 말하고 있다. 


 

어쩌면 영화 속 토니도 자아를 잃어버리고 오로지 본능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조국에서 쫓겨나 타국에서 자신이 예술혼을 꽃 피운 감독 역시 부유하는 삶이다. 토니나 감독의 본능은 둘 다 생존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반항심에 절어 무턱대고 주먹을 휘두르던 내 모습도 생존 때문이었을까?


 

자아와 확신이라는 고리가 어쩌면 우리 삶을 더 옥죄일수도 있겠다.  새로움은 고정관념을 깨는 일이다. 난 또 어떤 고정관념을 깨고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할까? 영화와 관계없이 고열 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글을 마치는 지금 거짓말 처럼 딸꾹질이 멈춰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