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zamsi bon cinema

선택할 용기, 리스본행 야간열차

zamsi 2015. 3. 21. 15:38

 

 

 

영화를 보면서 한 때 흠모했던 배우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읽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 일은 참 애련하다. 레나 올린. ‘프라하의 봄’에서 보여 준 퇴폐적이면서도 농염한 몸짓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밀란 쿤테라 원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국내에 개봉되며 붙은 제목이 ‘프라하의 봄’이다. 소설의 쉽지 않은 문법을 영상으로 제대로 옮긴 80년대 수작이다. 영화 속 사비나를 연기한 레나 올린의 분방하면서도 산뜻한 정염이 애틋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제레미 아이언스. 제법 좋아했던 배우다. 처음 제레미 아이언스를 만난 것은 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 거친 숨소리, 한 사내가 마치 업보와 같은 바랑을 걸머진 채 죽을 힘을 다해 가파른 절벽을 오르고 있다. 그 때 주제가 엔리오 모리꼬네의 '넬라 판타지아'가 흐른다. 깊은 눈, 무덤덤한 표정으로 신의 정의를 위해 죽음과 담담히 마주하던 신부가 제레미 아이언스다.  

 

제레미 아이언스와 레나 올린, 이 두 배우를 만날 수 있는 영화가 ‘리스본행 야간열차’다. 레나 올린은 엔딩씬에 잠깐 스쳐지나가지만 오래된 팬으로서 연륜 묻은 그녀의 연기를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제레미 아이언스는 영화의 주연으로 시종일관 지적이면서도 넘치지 않는 중후한 연기를 보여준다. 심심한 듯 담백하고 무심하면서도 내면의 깊은 심상을 끄집어내는 노배우의 연기가 아름답다.

 

노교수 그레고리우스는 출근길 우연히 다리 난간에서 자살하려는 빨간 레인코트의 여인을 구한다. 여인은 빨간 레인코트만 남기고 사라지는데 코트 속에 한 권의 책과 책갈피에는 리스본행 야간열차 티켓이 꽂혀있다. 여인의 흔적을 찾다 그레고리우스는 마치 홀린 듯 리스본으로 가는 야간 열차에 탑승한다. 그리고 의문의 여인이 남긴 책을 읽다가 생전 들어 본 적도 없는 저자 아마데우 프라도의 삶과 철학에 깊이 매료되고 만다.

 

이후 영화는 책의 저자 아마데우 프라도의 삶의 궤적을 찾아다니는 그레고리우스의 이야기다. 아마데우 프라도는 이름 없는 포르투갈의 의사이며 단 한 권의 한정본 책만 발간한 철학자이다. 프라도 역은 잭 휴스턴이 맡았다. 미드시리즈 ‘보드가야 엠파이어’에서 해로우 역을 맡은 영국 출신 배우다. ‘보드가야 엠파이어’에서는 전쟁통에 얼굴을 다친 가면을 쓴 킬러로 나오는데 반쯤 드러난 얼굴만으로도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 만큼 충분히 잘 생긴 배우다. 우수 깊은 눈빛이 선량하면서도 뜨겁다. 영화에서는 출신 성분 좋은 의사이지만 조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재정권과 싸우는 작가로 분했다.

 

프라도의 가장 친한 친구의 애인이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여인을 연기한 배우가 멜라니 로랑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라는 영화에서 나찌에게 부모를 잃고 레지스탕스가 되어 처절하게 복수하는 역을 맡았다. 나탈리 포트만의 지성미와 까뜨린 드뇌브의 청순함을 교묘하게 섞어 놓은 듯한 매력을 발산하는 배우다. 반항아 이미지 속에서도 농염한 퇴폐미가 숨어 있다. 불과 10여 분 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그녀에 대한 매력은 깊게 각인된다.

 

영화는 죽음을 무릎쓰고 독재와 맞서는 혁명가들. 그 속에서 피어나는 우정과 사랑 그리고 배신과 방황이 액자소설처럼 펼쳐진다. 지루할 것 같지만 긴장의 끈을 쉬이 놓지 않는 연출력이 관객의 시선을 팽팽하게 잡아둔다. 원작을 읽지 않은 탓에 영화의 결말이 다소 느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극을 이끌어가는 그레고리우스의 삶이 영화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방황하는 그레고리우스 보다 아마데우 프라도의 삶에 더 포커스를 집중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의 삶이 빈약하다. 두 인물 모두에게 집중하다보면 영화의 관점이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게다. 줄거리를 상세하게 서술하지 않은 이유는 혹 영화를 보는 분들을 위한 짧은 배려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알 수 없는 향수가 치밀어 올랐다. 리스본을 한 번도 가 본적 없지만 리스본 뒷골목이 풍기는 낯선 향취가 그립다. 쓸쓸한 자유, 홀로된 외로움이 간절해 진다. 사람은 때때로 혼자이고 싶다.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관계에 집착한다. 행복과 자유, 타자의 시선에 의해 의미를 부여 받아야만 하는 존재의 가치, 우리는 결국 관계의 속박에서 벋어나지 못한다. 매몰된 인간관계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조차 기실 따져보면 관계에 대한 굴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관계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건조한 일상을 선택했다. 그리고 무의미한 일상은 삶의 목적을 상실케 만든다. 그런 그에게 나타 난 아마데우 프라도의 삶은 현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영화를 보면서 문뜩 오래 전 기억이 상흔처럼 떠올랐다. 인도의 바르나쉬에서 겐지즈의 석양을 바라보다 까닭 모르게 울컥했던 ...

 

엔딩 씬. 기차가 다가온다. 리스본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베른행 기차를 기다리는 그레고리우스. 5분 후면 기차는 떠난다. 그레고리우스를 배웅나온 여인이 질문을 던진다.

 

“ 당신은 왜....?”

 

(질문을 제대로 인용하지 않은 이유는 당신의 느낌에 간섭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 질문이 가슴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그레고리우스의 삶에서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의 흔적을 읽기 때문이다. 새로움과 일상의 갈림길에서 그레고리우스는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나와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다. 행복해질 용기, 자유로워질 용기 관계라는 속박을 벗어던질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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