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zamsi bon cinema

운명의 힘

zamsi 2016. 7. 11. 17:29

운명을 믿느냐고? 운명 따위는 개나 줘 버려!

삶은 현재의 순간이 점층된 기록이야.

지금 내가 믿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운명이야.

 

운명을 입에 올리는 사람 대부분은 현재의 선택에 대한 자기 합리화야.

도대체 운명 따위가 존재한다면 삶은 왜 이다지도 불공평하고 힘겹단 말이야?

운명 따위를 만든 신은 직무태만으로 불지옥에나 떨어져 버려야 해.

 

그런데 의식의 존재, 이 찰나의 순간이 나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없는

내 몸속 말단까지 지배하는 DNA에 새겨진 아주 오래된 내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영겁의 시간동안 켜켜이 쌓여 온 결과물이라면?

 

운명의 힘

 



 

영화 마농의 샘

갓 스물을 넘긴 청춘, 낡은 3류 극장에서 봤던 영화다.

배가 고파 끼니를 잇기 어려웠지만 돈이 생기면 극장엘 갔다.

 

한국에서는 1편과 2편을 한데 묶어

동시에 개봉했는데 러닝타임만 장장 4시간이 넘었다.

영화는 3대에 걸친 두 가문의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사랑에 관한 아주 긴 서사극이다.

 

인연은 사랑을 만들고 사랑은 다시 증오로 변한다.

증오가 만든 이기심과 탐욕은 늘 그렇듯 불행으로 귀결된다.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한 사랑과 증오가 엮어 낸 드라마.

그 속에 운명이 은밀히 숨어 있다. 참 지랄 맞은 운명이다.

거의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다니엘 오떼유의 완벽에 가까운

메소드 연기가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다.

 

초로의 나이가 된 지금 문뜩 이 영화가 떠오른 이유는

라디오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서곡 때문이다.

장엄하면서도 애절한 선율이 한 번 들으면 쉽게 잊혀 지지 않는다.

베르디의 운명의 힘은 바로 영화 마농의 샘의 주제가이기도 하다.

상상만으로도 제라르 드빠라디유의 쓸쓸한 하모니카 소리가 쟁쟁하다.

 

운명을 믿지 않고 살아왔다.

삶은 스스로 만들어 간다고 믿었다.

세상을 살아갈수록 내 믿음이 오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옳다고 믿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내 믿음은 얼마나 허약하고 강퍅하며 위선적인가.

알량한 지식의 협량함이 참 부끄럽다.

 

곰곰 영화를 되짚어보면 사랑은 결국 운명의 굴레를 벋어날 수 없다

 

사랑은 개인의 DNA에 정보로 각인된 기호와 취향이 응축된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일생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만날 수도 있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본인의 의도와 노력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힘, 어쩌면 운명의 힘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우리는 운명 같은 사랑이라고 부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운명을 거부한 아니 어쩌면 운명에 패배한

이브 몽탕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죽음이 운명을 거부하는 마지막 저항이라는 점이 못내 아프고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