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zamsi bon cinema

유쾌한 울음소리 ‘곡성’

zamsi 2016. 6. 20. 15:02

 

<시작에 앞서 약간의 스포일러 있음>

 



 

  영화는 관객을 속이는 예술 장르다. 얼마만큼 완벽하게 또 그럴싸하게 잘 속이느냐가 작품성을 좌우한다. 영화라는 예술 장르의 본질이 감독과 관객 간에 쌍방이 속고 속아준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밑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관객이 속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거나 속을 마음이 전혀 없다면 영화라는 장르는 존립할 수가 없다. 애초 우리는 영화라는 속임수(거짓말)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지 현실(사실)을 확인하러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얼마나 관객을 감쪽같이 잘 속이느냐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속을 준비가 된 관객의 심리를 제대로 짚어 낸 작품이다. ‘곡성은 속을 준비가 된 관객에게 속임의 대상을 한 번 더 비틀어 무엇에 대해 속아야할지 헛갈리게 만들어 버린다. 이건 반칙이다. 애초 관객과 약속을 깨어버린 파격이다. 우리는 나홍진 감독의 이러한 방식을 열린 결말이라고들 말한다. 관객의 해석에 따라 결말이 바뀔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불친절하고 또 한 편으로 전복이 가져다주는 쾌감이 짜릿하다.

 

  곡성은 속고 속이는 불신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예수가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도들을 향한 성경의 꾸짖음으로 시작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누가복음 2437-39)

 

  사도들은 인간이며 예수는 신이다. 이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신의 영역에 대해 불신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신의 영역을 불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이라 할 수 없다. 인간이 신의 영역을 온전히 이해한다면 인간이 아니다. 오로지 신만이 온전하다. 그런 점에서 불신은 인간 고유의 특질이다. 하지만 신은 그런 인간의 불신을 꾸짖는다. 그리고 그 불신의 이유가 두려움이라고 친절히 가르쳐 준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두려움이란 원죄에 기인한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원죄. 죄 없는 사람은 오직 신밖에 없다는 것이 기독교적 해석이다. 때문에 그 인간의 죄를 자신의 피로 대속한 예수를 믿는 것이 원죄에서 구원받고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데 찬찬히 따지고 보면 인간에게 죄와 두려움을 가르치는 것은 신이다. 신은 인간의 불신을 징치하고 심판한다. 그런데 신이 강권하는 믿음의 정확한 판단 기준이 필요하다.. 대저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 신에 대한 믿음이 선이고 불신이 악이라는 일방적 규정은 너무 불공평하다.

 

  곡성은 인간 개개인의 불신을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곡성이라는 이름의 오지마을에서 해괴하고 괴이한 살인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데 그 죽음의 이면에는 악령이 존재하고 있다. 문제는 이 악령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그러한 일을 벌이는지에 대한 시작과 결말이 없다. 악은 그냥 존재하고 있으며 악의 존재를 믿고 파헤치는 사람들은 악에 감염된다. 이 말은 반대로 선에 존재를 믿고 파헤치는 사람 역시 선에 감염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감독은 선과 악 그리고 믿음과 불신의 덫을 파놓고 관객이 함정에 빠지길 기다린다.

 

  영화에서 악과 선은 똑같은 존재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선악의 구별은 종교적 의미에서 믿음으로 규정해버린다. 믿음은 선이고 악은 불신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악을 양산해왔다. 근대에 이르기 까지 기독교는 예수가 아니면 모두를 악으로 규정하는 살육의 역사를 써왔다. 십자군이라는 이름으로, 마귀 퇴치라는 이름으로 유사 이래 기독교만큼 많은 인간을 학살해 온 종교는 없다. 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살육은 악을 처단하기 위한 선의 투쟁으로 변질된다. 그리고 희생자는 불신이라는 이름 하나로 심판받고 죽어 마땅한 악인이며 죄인이 되고 만다. 그 종교적인 살육의 전철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재현하고 있다. 예수도 마호멧도 자신을 불신한다하여 사람을 죽이라 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곡성은 누가 신이고 누가 마귀인지 확실히 말하지 않는다. 무엇이 중하고 무엇이 가벼운지도 말하지 않는다. 공교한 대본은 모든 등장인물에 조금씩 사건을 유추할 수 있는 트릭을 숨겨 놓았다. 때문에 누구를 악으로 규정해도 이야기는 별 무리 없이 진행되고 해석된다. 감독의 트릭은 불신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기묘하게 비틀어 놓았다. 영화를 보면서 잘못된 믿음이 불신보다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잘못된 믿음을 강요받고 살아간다. 소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악이고 처단해야할 대상이 되고 만다. 철학도 종교도 예술도 극단을 치닫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다름을 먼저 인정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나와 또는 우리와 다름이 죄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영화 곡성은 다름에 대해 꼽씹어 볼 기회를 제공한다.

 

  우린 흔히 예술영화에 대해 감동해야만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다. 작가의 철학적 사유가 깊이 내재된 영화들이 대체 그러한데 그런 영화들의 공통점은 매우 난해하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봤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노스텔지어라는 영화는 오직 그 난해함 때문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재미도 더럽게 없고 내용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짙은 예술성과 진중한 미장셴 때문에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영화를 만나게 되면 일단 자신의 무식함을 반성하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나의 무식과는 아무 상관없이 잘 만들어진 예술영화는 작가의 철학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미안하지만 영화 곡성은 앞서 말한 재미도 더럽게 없는 예술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예술관이 영화에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곡성은 아주 잘 기획되고 철저하게 계산된 오락영화. 진지하고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관객을 몰입시키는 힘을 가진 영화다오락영화라는 표현에  영화 곡성의 작품성을 폄훼할 의도는 전혀 없다. 잘 만들어진 오락영화는 예술영화 몇 배를 찜 쪄 먹는 감동을 자아낸다. 영화 곡성은 아주 잘 만들어 진 보기 드물게 진지한 오락영화다.

 

  “절대 현혹되지 말라는 영화 포스터에 절대 현혹되지 마라. 너무 깊이도 생각하지 마라. 그럴수록 당신은 감독이 파 놓은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