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zamsi bon cinema

우리 안의 괴물

zamsi 2009. 8. 3. 08:30

난 개인적으로 봉준호 감독의 팬이다.
봉준호 라는 이름을 처음 기억한 것은 10 여년 전
단편 영화제에서 "지리멸렬" 이라는 작품을 보고나서 부터다.
사물과 현상에 접근하는 감독의 시선이 코믹하면서도 고급스러움을 잃지 않아 신선했다.
그 때 부터 난 봉준호의 장편 입봉작을 기다렸다.

유학을 마친 봉준호의 장편 첫 작품은 "플란다스의 개" 이다.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평단의 나쁘지 않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폭싹 망하고 말았다.
숨어 있는 걸작이니 시간이 넘쳐나는 분들께만 강추!

이후 모두들 다 아시는 "살인의 추억"으로 대박 감독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이에 힘 입어 영화 "괴물"은 개봉도 되기전 입소문을 타면서 화재를 몰고 다녔다.
결국 화재에 불이 제대로 붙어 대박을 치고 있다.

그런데 사실 난 영화를 보고 조금 실망했다.
너무 기대를 많이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

기대를 하고 봤는데 기대에 못 미쳐 실망하는 경우,
기대를 안하고 봤는데 의외로 괜찮아 뿌듯한 경우.

어떤 게 더 좋을까?

블록 버스터의 고질적인 문제점 중 하나는
개연성과 인과 관계를 무시한 느슨한 대본이다.
예컨데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주인공들이 저 철통 같은 경계망을 뚫고 저 곳에 저토록 쉽게 갈 수 있지? "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물론 영화의 빠른 전개에 묻혀 이러한 의문은 쉽게 잊혀지긴 한다.

그렇다고 "괴물" 의 대본이 아주 부실하다는 것은 아니다.
봉준호는 그럴 정도로 영화를 막 만들지 않는다.

영화는 산만하면서도 나름의 공교로운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전개 과정에서 가족의 이야기와 괴물에 의해 갇힌 딸 현서의 교차 편집은

두 상황의 대비와 동시에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딸을 찾는 준비 과정을 교묘하게 상쇄해 버린다.
거기에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극적 장치를
가족애와 괴물이 주는 상징적 공포를 버무려 곳곳에 숨겨놓았다.

관객의 심리를 아는 감독의 장난(?)이다.
봉준호 어느새 관객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점이 못내 아쉽다.

그의 늘어 난 스킬이 나에겐 오히려 불편했다.
하지만 내가 불편한 만큼 영화는 흥미진진하다.

영화가 끝난 후 난 봉준호가 말하고자 하는 괴물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괴물" 우리 일상 속의 괴물.

김규항은 이를 일상적 자기 안의 파시즘이라고 표현했다.
봉준호가 표현하는 괴물은 김규항이 말하는 인간 내재적 괴물이 아니다.
봉준호는 우리를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집단적 괴물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 너무 치졸하다.
영화 속의 메타포는 숨어 있고 녹아 있어야 고급스럽다.
하지만 봉준호가 말하는 괴물은 너무 노골적으로 보란 듯 그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영화는 포르말데이드라는 독극물을 하수구에 무단 폐기하는 미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는 그 환경 파괴로 인해 돌연변이 괴물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암시이다.

즉 미군에 의해...

그리고 괴물은 한강변을 덮치고,주인공 강두는 괴물에게 딸을 잃고 만다.
이후 영화는 죽은 줄만 알았던 딸 현서를 찾아가는 강두(송강호 분) 가족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평범한 스토리에 감독은 많은 장치를 숨겨두고 있다.
우선 강두의 가족에겐 어머니가 없다. 강두에게는 아내도 없다.
홀아버지와 딸 현서, 양궁 선수인 여동생과 셀러리맨 동생이 전부다.

대를 잇는 결손 가족. 이는 분단된 조선반도의 현실과 일치한다.
동강 난 민족의 결손이 강두 가족의 대를 잇는 결손과 교묘하게 맞물린다.

물론 여기에는 어머니가 개입된다면
극을 이토록 드라이하게 이끌 수 없는 감독의 고민도 숨어 있었으리라.
왜냐하면 모든 모성은 자식 앞에서 극단적이며 초월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극 중 강두의 남동생(박해일 분)은
학생운동을 해왔지만 세상에 불만이 많은 투덜이로 표현된다.
형을 무시하고 형의 존재 가치를 깡그리 부인하는 것 또한
그 시대의 운동권들이 선배에게 보여주던 행태와 비슷하다.

풍자의 압권은 박해일의 운동권 선배가
현상금에 혹해 박해일을 경찰에 넘기려는 장면이다.

봉준호는 이 땅 운동권들의 물신주의와 위선과 대책없는 투덜거림을 한 번에 폭로한다.
또한 마지막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에서 박해일은 괴물을 향해 화염병을 투척하는데
그 모습이 80 십 년대 독재라는 괴물을 향해 꽃병을 날리던 모습과 흡사하다.
하지만 그 때의 운동권이 그랬듯 괴물을 쓰러뜨리는 역사의 주인공은
386의 꽃병이 아닌 이름 없는 민초이다.
괴물의 정수리에 휘발유를 뿌리는 사람은 외면 당하고 살던 이름 없는 부랑자이다.

또한 그 곳에 불을 댕기는 화살이 퍽 이채롭다.
활은 흔히 한국의 정신을 상징한다. (나의 과도한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봉준호는 영화를 통해 "괴물"과 미국을 상치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
괴물이 한강철교에 거꾸로 매달린 모습과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를 없애려
세균가스를 뿜어 대는 이름도 알 수 없는 기계의 모습은 아주 흡사하다.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를 없애기 위해 미군이 개입하는 장면은
있지도 않은 이라크의 대량 살상무기를 없앤다는 구실로 학살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범죄를 연상시킨다.

또한 자신들이 만들어 낸 오사마 빈 라덴과 후세인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현재 미국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극 중 강두 가족은 피해자이면서도
공권력과 정치적 압력에 박해 받으며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 쫓겨 다닌다.

그들의 가해자가 되어가는 과정에는
마치 공식처럼 언론(메스 미디어)의 과장 왜곡 보도가 한 몫을 하고 있다.
북한은 경제제재의 실재적인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가 되어있다.

그리고 감독은 공권력과 정치의 최정점에 미국을 그려넣고 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미국이라는 괴물이 주는 두려움이
이미 우리 안에 일상화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두려움에 면역되어 공포 자체를 자각하지 못한다.
공포의 대상은 스스로 괴물을 만들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기는 동시에 공포의 타켓을 교묘하게 괴물로 옮겨놓고 있다.

괴물이 스스로 만든 괴물을 처단하며 정당성과 부정의한 정의감을 획득한다.

"괴물" 이 영화는 노골적으로 정치적이다.
난 봉준호의 정치적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골적 정치성이 못내 아쉽고 못 마땅하다.

밝혔듯 영화 속 메타포는 은밀할 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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