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zamsi bon cinema

두 상수 이야기

zamsi 2009. 8. 3. 08:49

한국에는 "상수"라는 이름을 가진 걸출한 두 명의 영화감독이 있다.

홍상수와 임상수.

이 둘은 자기만의 또렷한 색채를 그릴 줄 아는 예술가들이다.
하지만 이 둘은 이름만 같을 뿐 추구하는 영화의 색깔은 판이하다.

홍상수가 일상에서의 단상, 우리가 쉽게 흘려버리는 인간 존재에 대한 내밀한 의식을 끄집어내는
반면 임상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선 굵은 비판을 숨기지도 않고 보란 듯 까발린다.

홍상수는 90년 대 후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제목의 영화로 한국 영화판을 발칵 뒤집으며 그야말로 난데없이 출현했다.
당시 그의 영화는 제목만큼이나 파격적이었으며 신선했다.

유학파인 홍상수의 영화는 지적이면서도 세련되며 다분히 고급스럽다.
또한 작가의 감정이 절제되어 사물과 현상에 대한 시선을 냉정하게 객관화한다.

이에 반해 임상수는 충무로 조연출로 빡빡 기다가
"처녀들의 저녁 식사" 라는 대략 도발적인 작품으로 우리에게 첫 선을 보인다.

임상수의 영화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 영화 도처에 살아 숨 쉰다.
부조리한 현실에 의해 소외받는 사람들과 주류가 되지 못한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애정이 영화의
밑바닥에 질펀하게 방사되어 있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필모그래피를 조금만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입봉작 ‘처녀들의 저녁식사’와 "눈물" "바람 난 가족" "그 때 그 사람들"이 임상수가 만들어 온 영화이다.

같은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확연하게 다른 두 사람.
하지만 나는 이 둘에게 애매모호한 동질성을 발견한다.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내가 발견한 두 감독의 동질성이란
둘의 영화가 철저하게 사실적이며 그 사실의 기반을 일상과 현실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 기반을 둔 채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두 감독.

하지만 이들이 현실을 풀어내는 방법에 있어서의 스타일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임상수의 영화는 공교하게 잘 짜인 서사구조를 가지고 출발한다.
그리고 그 극적 얼개에 교묘한 신파가 숨어 있어 관객이 극에 몰입하기가 쉽다.
또한 영화 곳곳에 그 만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아릿하게 녹아있다.

이에 반해 홍상수의 영화는 너무 일상적이고 자유스러워
오히려 현실과 극의 구별을 방해하며 관극하는 관객을 고립시킨다.
이러한 일종의 ‘소외효과’는 관객에게 영화를 보고 난 후 곰곰이 되짚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서두가 너무 길다. 각설하고...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을 봤다. 난 몇 년 전부터 기실 홍상수의 영화에 식상해 하고 있었다.
삶의 정곡을 찔러 통쾌함을 주던 그의 냉소적인 대사들은 점점 말장난처럼 들려지고

고급함을 지향하기 위해 과잉된 저급함의 표출에서 위악을 느낀 까닭이다.
위악은 위선 보다 훨씬 교만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해변의 여인"은 퍽 재미있었다.
이제는 늙어버린 고현정의 억지스러운 애교가 좀 거슬리긴 했지만

충분히 용서해 줄 수 있었다. 하물며 내가 좋아하는 송선미라는 여인네마저 나오는데 ^^
홍상수는 줄 곧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에 대해 아플 정도로 신랄하게 비웃고 있다.

그의 영화 대부분의 주인공은 소위 말해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다.
소설가, 교수, 화가, 연극배우, 교수부인, 영화감독 등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홍상수는 지식인이라는 가면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허위의식을
얄미울 정도로 간단명료하게 무찌르며 냉소해 버린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가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조롱하는 도구가 "성’이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 내재된 성의식은 동일하다. 대통령의 성의식과 이효리의 성의식과
또는 서울역 노숙자의 성에 대한 본질적 욕구는 대동소이하다고 나는 믿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성의식은 철저하게 가면을 쓰고 있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또는 보여 지는 ‘가면’과 ‘성의식’은 동일하다.
언젠가 외신을 보니 프로이드 역시 처제와의 불륜이 들통 나고 말았더군^^

홍상수의 성에 대한 집착에 우리가 무릎을 치며 공감하는 것은
우리가 감추고 있던 성의식을 영화를 통해 발견하는 까닭이다.
해변의 여인에서 극 중 네 명의 주인공은 모두들 가면을 쓰고 있다.

고현정은 자유로우며 쿨한 척하지만 권력을 지향하며 권력과 명예에 복종한다.
한 때 내가 알던 사람 중 한국남자가 정말 싫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가 정작 싫어하는 한국남자들이란 권력과 명예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즉 정신적 된장녀되겠다.

송선미는 남편의 외도에 괴로워하지만 정작 자신이 벌여가는 외도는 별개다.
남편 외에 애인이 보편 일상화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김태우는 유부남이면서도 애인에 대한 독점욕을 가지고 있다.
고현정을 좋아하지만 그녀에겐 친구 일 뿐이다. 친구! 가장 비참한 말 중에 하나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김태우가 불쌍했다. 이런 된장 맞을...

마지막으로 김승우가 분한 감독 역은 홍상수의 페르소나 일지도 모른다.
홍상수 이제는 자신의 허위의식에 대해서 마저 가차 없이 메스를 들이밀고 있다.

나는 각기 다른 네 인물이 가진 허위의식에 대한 조롱을 보면서 한편으로 통쾌했지만 짐짓 부끄러웠다.
나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식인이라는 건 아니다 ㅠㅠ)

홍상수의 영화는 일관성이 있어 좋다.
그동안 홍상수에게 보냈던 나름의 적의를 살짝 거두고 다시 사이좋게 잘 지내기로 했다^^

그의 작위적인 위악에서 드러나는 교만이 다소 거슬리긴 하지만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 사람은 못 되더라도 사기꾼이 되어서는 안 되지!!!!
근데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는 사기꾼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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