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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아빠의 출산보조기

zamsi 2011. 2. 15. 15:46

지난 일요일, 원고 마감 날이다.

때려 죽여도, 월요일 아침까지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밤을 꼬박 새웠다. 입안이 깔깔하다.

아내가 눈을 뜨자마자 병원을 가야겠단다. 

지난번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일요일까지는 넘기지 말자고 했다.

벌써 예정일을 나흘이나 넘긴 상태다. 

 

입버릇처럼 아빠 원고 끝나고 나오라고 타일렀는데 용케도 잘 견뎌 주고 있다.

문제는 탈고가 남았다는데 있다. 1차 탈고는 끝냈지만 성에 안찬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원고를 손질하고 싶다.

 

아내는 눈치가 빠르다. 내 생각을 읽었나 보다.

병원에 가 있을 테니 일을 끝낸 후 오라고 한다.

결국 아내 혼자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손가락이 아플 지경으로 자판을 두들겨 댔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배도 고프지 않다.

12시 쯤 아내에게 문자가 왔다.

 

"양수가 터졌어!"

"음... 다 됐어. 좀만 기다려"

"알았어. 빨리 끝내고 와."

 

마음이 다급해진다. 그리고 혼자 있을 아내에게 미안해진다. 

이후 두 시간이 후딱 지났다. 2시가 다 되어갈 무렵 또 문자가 왔다.

 

"진통이 시작되려고 해."

 

마지막 원고가 세 페이지 정도 남았다.

대충 눈으로 훑었다. 그래 이정면 됐다. 출판사로 원고를 쐈다.

겨우 눈꼽만 떼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내가 분만실에 덩그마니 혼자 누워있다.

다행이 아직 진통이 심하진 않은 것 같다. 

아내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그 와중에서도 아내는 원고를 끝냈냐고 묻는다. 착한 아내.

 

옆 분만실에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아내는 우아하게 낳고 싶단다. 비명을 지르지 않을 자신이 있단다.

분만실에 혼자 누워 책을 읽고 있던 사람은 자신 밖에 없었단다.

아내가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러나 미안한 만큼 배가 고파왔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거의 24시간 잠도 못 잤다.

 

결국 분만실에 들어 온지 5분 만에 밥을 먹으러 다시 나가야 했다.

아이를 낳기 위해서 산모의 체력만 필요한 게 아니다.

아빠의 체력도 필요하다. 게다가 난 노산 아빠가 아닌가!

 

병원 앞 중국집에서 짬뽕밥을 먹고 있는데 아내에게 또 문자가 왔다.

 

"진통이 심해 빨 와!"

 

기어이 시작되는구나!

후다닥 먹고 싶었지만 잘못하면 체할 것 같아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마음을 급하게 먹으면 정말 체할 것 같았다.

역시 늙은 아빠는 좀 더 세상을 여유롭게 보는 힘이 있다.

 

분만실로 들어가자 아내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다.

아프긴 한가보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아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신음을 참으며 끙끙거리던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양파 냄새 나"

 

아직 살만 한가보군. 아내가 안쓰럽다. 하지만 딱히 내가 해야할 게 없다.

아파서 끙뜽대는 사람에게 아프냐고 물어 볼 수도 없다.

고통으로 몸부림 치는 사람더러 참으라고 말하기도 그렇다.

하는 수 없이 손이나 잡아 줬더니 손을 훽 뿌리친다. 걸리적 거린단다.

 

오후 3시가 넘어가자 점점 아내의 우아한 모습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급기야 4시가 되자 울부짓듯 비명을 질러댄다.

그런 아내에게 차마 "우아하게 낳고 싶대매"라고 물어보지 못했다.

의사가 들어 온다. 아내가 다급하게 얼마나 더 걸려야 하는냐고 묻는다.

최소 7시가 되어야 자궁문이 다 열릴 것 같다고 말한다.

 

"세 시간만 참아보죠"

 

의사는 이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세 시간'이라는 말에 아내는 절규한다.

 

"어떻게 세 시간을 더 참아! 으악!!! "

 

아내는 거의 한 시간 동안 2분 간격으로 발작처럼 포효했다.

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무기력했다.

5시에 의사가 다시 들어왔다. 자궁문이 잘 열리지 않는단다.

아내가 비명을 지르듯 외친다.

 

"제왕절개 해 주세요! "

 

의사는 아직 모르니 한 시간만 더 지켜보자며 아내를 달랬다.

그리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호흡법을 가르쳐 주고 갔다.

 

이후, 내가 해야할 일이 생겼다.

2분 마다 한 번씩 진통이 오면 숫자를 세는 일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세면 그에 맞추어 아내가 거의 미친 듯이 호흡을 한다.

 

"쓕쓕 쓕쓕..." 세상의 공기란 공기는 다 흡입할 듯

 

열 번이 끝나면 다시 천천히 호흡을 하라고 말해준다.

그런데 조금 해보니 바로 요령이 생긴다. 

더 놀라운 것은 나도 몰랐던 숨어있던 천부적 재능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내가 아내를 다독이는데 탁월한 소질을 보인 것이다.

 

"빠르게 쒹! 쒹 하나 둘.... "

"천천히. 천천히 편안하게 편안하게 아주 편안하게 호수처럼 잔잔해 잔잔해.... "

 

나는 마치 최면술사라도 된 듯이 아내를 상대로 최면걸기에 들어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내 최면이 통했는지

말 아내가 편안해하고 통증을 잘  견디며 참는다는 것이다.

그 이후 아내는 두 시간이 넘도록 거의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체면이 신기에 가까운 신공을 발휘해

아내는 진통이 잠깐 멈춘 틈에는 정말 편안하게 잠까지 잤다.

 

비명이 낭자하던 분만실이 조용해지고

"하나, 둘, 셋.... 천천히 천천히 편안해 아주 편안해 " 하는 소리만 들려오자

간호사들이 분만실 문을 빼곡이 열고 나의 최면술을 지켜 볼 정도였다. 

 

이윽고  7시가되었다. 의사가 다시 들어왔다.

그렇게 기다리던 7시다. 그러나 낭패스럽다.

아직 자궁문이 다 열리지 않았단다.

최소 10cm가 열려야 하는데 아직 조금 멀었단다.  아내가 다시 외쳤다.

 

"제왕절개 해줘요!"

"잘 참았는데... 아깝잖아요"

"하나도 안 아까워요. 해줘요"

 

의사는 아내 말을 무시한채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말만 남기고 다시 사라졌다.

하는 수 없이 나의 최면술은 다시 시작되었다. 하나, 둘, 셋.....

아내가 더 없이 가련해 보였다. 

8시가 넘어가자 드디어 자궁문이 다 열렸다.

 

아! 끝났다.라고 생각했지만 개뿔!!!!

본격적인 시작은 그 때 부터였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 아이를 밀어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자궁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진통보다

몇 갑절 더 견디기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수간호사가 힘 쓰는 법을 가르쳐 주고 나갔다.

 

이제부터 드라마에서 익히 봤왔던 모습이 재현되기 시작했다.

난 아내가 머리를 드는 것을 도와 주며

"힘 줘. 옳지. 조금만 더! 끙야. 그렇지" 를 외쳐야 대야만 했다.

나름 우아했던 최면술사는 사라지고 어느덧 난 조산소의 따까리 산파가 되어있었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내 배가 다 아플지경이다. 젠장 그 와중에 배까지 고프다.

 

제왕절개! 제왕절개! 를 외치는 아내의 목소리가 어찌나 가련한지

의사를 찾아가 제왕절개 시도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 봤다.

의사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옆에 있던 수간호사가 눈을 흘기며 야멸차게 말했다.

 

"저 정도 안아프고 어떻게 아이를 낳아요! "

 

음,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내 배가 아픈 건 아니니... 

본격적으로 간호사가 붙었다. 힘 줘, 힘 줘를 외치기를 거의 한 시간.

아내는 기진맥진하여 거의 펑펑 울고 있었다. 안쓰럽다. 아내의 배에 대고 속삭였다.

 

"율리야. 이제 그만 나오자. 응!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말고, 혼자 힘으로 쑥 나오는거야."

 

그로부터 1시간 후 오후 9시 41분. 아내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거짓말 처럼 율리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율리가 나왔다. 세상에... 세상에....

울던 율리를 아내의 배위에 얹자 울음이 뚝 끊어졌다. 

낯익은 엄마의 심장소리에 안도했나보다.

 

탯줄을 자르고 율리를 목욕시킨다. 아빠인 내가 율리의 머리를 감쌌다. 

율리가 다시 자지러지게 운다. 율리의 머리에 대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엄마 뱃 속에 있을 때 아내의 배에 대고 줄 곧 불러주었던 노래다.

그 노래는 고드름이라는 동요에

태명 '복순이' 이름을 아무렇게나 붙여 불러 준

복순이와 나 그리고 아내만 아는 노래였다.

 

"복순이 복순이 수정복순이

 복순이~ 복순이~ 수정 복순이

 복순이 복순이 수정복순이"

 

울던 율리가 울음을 뚝 멈추었다.

노래가 끝나면 울고, 노래를 다시 부르면 거짓말처럼 울음을 멈췄다.

아! 율리는 아빠가 불러주던 노래소리를 기억하고 있나보다.

 

율리가 신생아실로 들어갔다. 

분만실 복도에 우두커니 않았다.

끝까지 참아 준 아내가 너무 대견하고 고맙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런 느낌도 없다. 

감격스럽지도, 감동스럽지도, 기쁘지도 않았다.냥 착찹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좀 울적했다.

 

이 울적한 기분의 이유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이가 태어나고 아빠가 되었다.

그러나 난 웬지 우울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지만 우울했다.

 

이 험한 세상 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율리는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아내와 나는, 율리가 사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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